2024.08.18. ~ 2024.08.28. (11)
다섯 번째 감각
김보영 저
아작 출판
2022년 02월 10일 출간
오래도록 한국의 SF에는 김보영이 빛나고 있었다
한국 SF 작가로서는 처음으로 전미도서상 후보에 오른
김보영 초기 걸작 10편을 드디어 다시 만난다!
2010년 김보영의 소설집 『멀리 가는 이야기』와 『진화신화』가 처음 나왔을 때, 소설가 박민규는 다음과 같이 썼다. “여왕의 등극이다. 김보영의 작품들이 언젠가 한국 SF의 ‘종의 기원’이 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로부터 10년 뒤, 김보영은 한국 SF 작가로서는 최초로 미국 최대 출판사 하퍼 콜린스에서 영문 단편집을 출간했고, 또 다른 영문 단편집으로는 전미 도서상 후보에 오르는 쾌거를 이루었다.
『멀리 가는 이야기』와 『진화신화』를 두고 여러 SF 관계자들이 입을 모아 “한국 SF 사에서 전설로 남을 것”이라고 평했고, 그 예언은 모두 사실인 것으로 드러났지만 두 책은 안타깝게도 절판되어 서점에서 구할 수 없다. 반갑게도 수록작 중 「미래로 가는 사람들」을 비롯해 몇 편이 재출간되어 독자들을 다시 만날 수 있게 되긴 했지만, 여전히 실질적인 의미에서 “한국 SF의 기원”으로 일컬어질 작품들을 독자들이 쉽게 만나보기 어렵다면 그것은 우리 모두에게 불행이 아닐 수 없다.
12년 만에 복간되는 김보영 소설집 『다섯 번째 감각』에는 『멀리 가는 이야기』와 『진화신화』 중 따로 출간된 「미래로 가는 사람들」 연작과, 후속편을 집필해 장편으로 준비 중인 「종의 기원」 연작, 그래픽 노블로 나오게 될 「진화신화」, 그리고 『얼마나 닮았는가』에 수록된 「0과 1 사이」를 제외한 모든 작품이 수록되었다. 데뷔작이자 제1회 과학기술 창작문예 대상을 받은 「촉각의 경험」에서부터 한국 SF 역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작품 중 하나로 기록될 「지구의 하늘에는 별이 빛나고 있다」까지, 오래도록 한국의 SF에서 빛나고 있었던 김보영의 초기 걸작들을 다시 만나보자.
내가 상자에 들어갈 때마다 창피해하신다. 수시로 나를 붙들고 ‘포기하지 마라. 너는 나을 수 있다’라고 말씀하신다. 내가 집을 떠나와 사는 것은 그 때문이다.
“왜들 그렇게 내려가는 거지?”
나는 아래를 보았다. 올려다보다가는 현기증으로 기절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검은 길이 죽음처럼 입을 벌리고 있었다. 금세라도 하얀 이빨을 들이대고 나를 집어삼킬 것만 같았다.
사람이 죽으려고 이미 작정했는데 의식하지 못하는 수도 있는 모양이다. 아니, 나는 의식하고 있었다. 나는 올라갈 수가 없었다. 하강자는 자신이 내려온 길을 역순으로 계산할 수 있다. 올라가는 데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내 체력이 얼마나 버텨줄지. 나는 하강한 지 서너 시간 만에 내가 올라갈 수 없는 지점을 지나버렸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나는 내려가겠다고밖에 말할 수가 없었다. 올라갈 수가 없었기 때문에.
나는 얼굴을 감쌌다. 나는 사기꾼이다. 올라가지 못할 줄 알면서도 여기까지 왔다. 동료들 모두를 속이고.
─ 내려가라.
라고.
땅 밑에, ‘모든 것’이, ‘만물과 무한한 시간과 공간’이 있다고.
그러니까 우리는 더 내려갈 수 있다고.
“만약 실험해서 클론의 머릿속에 아무것도 없다는 게 밝혀지면 어쩌실 생각입니까? 그런 데 시간과 돈을 낭비한 책임은 어떻게 지실 겁니까?”
“클론이 꿈을 꾸는 동안 사장님의 뇌는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클론의 꿈을 관찰하기 위해서요. 클론은 그런 사장님의 생각을 읽었고, 그것이 클론의 경험에 더해졌고, 클론은 다시 그 정보를 토대로 꿈을 꾸었습니다. 그 꿈을 다시 사장님이 읽으신 것입니다.”
갑자기 생각이 났다. 나는 그 가락을 알고 있었다. 언니가 언제 어느 때에 그 가락을 불렀는지 알고 있었다. 높고 낮게, 부드럽게 강하게, 오르내리며, 내 목 안에서, 내 배 속에서, 내 폐 속에서, 살아 약동하는 무엇인가가 입을 통해 흘러나왔다.
노래를 마쳤을 때, 나는 태어나 처음으로,
정적을
느꼈다. 소리가 정지한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꼼짝도 않고 멈춰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의 움직임을 따라 귀가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나는 주위에 가득 찬 모든 소리를 구별할 수 있었다. 사람들의 웃음소리, 손뼉 치는 소리, 환호성, 그들이 일어날 때 옷깃이 부스럭거리는 소리, 발이 바닥에 닿는 소리. 사람들의 각기 다른 목소리. 윤성이 기쁜 얼굴로 나를 껴안을 때 그의 목에서 나는 소리, 그의 옷에 달린 단추가 내 옷에 닿아 쓸리는 짤그락 소리마저 들을 수 있었다. 내 발아래 앉아 있던 패치가 고개를 들며 입을 열었을 때, 나는 그의 작고 귀여운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나는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세상은 음악으로 가득 차 있고, 소리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을.
언젠가 선배님과 논쟁했던 일이 떠오릅니다. 선배님은 평등이란 서로 같아지는 것에서가 아니라 다른 점을 인정하는 것에서 온다고 하셨지요. 사회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것은 획일이 아니라 조화고, 키를 맞추는 것이 아니라 키가 다른 사람들이 서로를 보완하는 것이라고. 그런데도 역사는 언제나 어느 한 부분을 배제하고 축소하고, ‘더 낫거나’ ‘더 옳다’고 믿는 것을 과다하게 확장하는 데에만 주력해왔다고요. 비대하게 기울어진 가치관은 결국 쇠퇴를 가져오고, 뒤를 잇는 문명은 다시 다른 쪽 저울에 추를 과다하게 올려놓는 모순을 반복해왔다고요.
1
입력 “안녕하세요.”
출력 “안녕하세요.”
“23년 만이로군. 이곳에서 외지인을 보는 건.”
남자가 말했다. 남들보다 머리 하나가 큰 사내였다. 검은 피부에 다부진 체격이다. 검은 물감으로 눈 주위를 칠하고 뺨에는 두 줄의 문양을 내고, 머리는 땋아 뒤로 묶고 검은 머리띠를 두른 차림이다. 손으로 무두질해서 만든 듯한 가죽옷 차림인데, 바느질이 꼼꼼했고 문양이 섬세했다. 등에는 활과 화살집을, 허리에는 단검과 장검을 양옆에 하나씩 차고 있었다.
“그렇게 늙어 보이지 않는데요.”
여행자가 말했다.
“외모는 얼마든지 조정할 수 있어. 자네도 실제로는 내 눈에 보이는 것과 다른 모습일 가능성이 높지. 그렇지 않았다면 나는 자네에게 동전이라도 몇 개 던져주고 신경을 껐을 거야.”
여행자는 왜소한 체격에 갸름한 얼굴이었다. 뺨은 검댕으로 얼룩덜룩했고 머리는 덥수룩하니 까치집이었다. 맨발이었고 낡은 거적에 머리와 팔이 들어갈 구멍만 내어 만든 옷을 입고 있었다.
여행자는 머리를 벅벅 긁었다.
“1레벨이라서요. 직업이 ‘거지’더군요. 구걸 기술만 있어요. 주인이 쫓아내려고 해서 들어오는 데도 애를 먹었어요. 양복이라도 입고 올 생각이었는데 그 비슷한 옷이라도 입으려면 20레벨까지 올려야 하더군요.”
“무슨 소리지?”
“아아, 미안해요. 다들 선생님께 게임용어를 쓰지 말라고 하더군요. 선생님은 아주 완고한 롤 플레이어고, 세계관에 맞지 않는 용어를 쓰는 사람과는 이야기하지 않는다고요. 그래서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지 고민을 많이 했어요.”
“그래픽이 깨졌군요. 폴리곤 좌표 하나가 깨졌어요. 워낙 옛날 게임이라 프로그램을 짤 수 있는 사람도 소스를 분석할 수 있는 사람도 없으니, 저런 오류가 계속 늘어날 거예요. 에…… 그러니까, 차원이 깨지고 있어요. 혼돈이 점점 넓어질 거예요. 언젠가 세계를 삼켜버릴 겁니다."
“……하지만 그 약초는 무시무시한 용이 지키는 동굴 안에 있는데, 아무도 그 안에 들어가본 적이 없다고 합니다…….”
땅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독특한 소재를 소개받았을 때에는 그래봤자 SF일거라고 생각했다. 많은 대한민국의 SF 소설들은 현실을 반영하는 독특한 스토리를 가지고 있으니까. 그런 이야기가 실제로 다양한 영향력을 가지고 많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뿌리를 내리는 것은 사실이지만, 소재가 독특하다는 것 외에는 충격적인 소재의 끝까지는 보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이야기에 충격적인 반전이 있거나, 사실은 이런 진실을 숨기고 있지~ 하는 류는 많이 봤어도 말이다. 물론 내가 책을 많이 안읽기는 했지만, 아무튼 나의 그런 데이터베이스에서 나온 결론은 그래봤자~라는 예상 정도였다. 그런데 실제로 책을 읽고 나니 너무 신기한 소재와 엔딩이 있어서 놀라웠다. 예를 들어 <땅 밑에>의 경우가 내가 추천받은 땅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였는데, 이건 사실 추천을 받을 당시에 내용을 예상했었지만 그럼에도 읽는 내내 충격에 가까웠다. 보통 이야기가 버라이어티하면 영화같다는 생각을 하는데, 이건 책이기에 가능한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땅 밑에>는 연극으로도 제작되고 있다고 하니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연극을 관람해보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내용을 어떻게 연출할 것인지가 정말 기대된다.<다섯 번째 감각>은 제목과 동일한 제목의 단편인데, 사실 이 단편의 경우에는 내용을 이해하지 못해서 앞부분을 3번 정도 다시 읽었다. 이러다가 다섯 번째 재독이 되겠어~ 하며 낄낄거리다가 그냥 쭉 내용을 읽어나갔는데 그제서야 이해가 되었다. 스포이긴 하지만, 이야기를 하자면... 시각, 후각, 미각, 촉각 그리고 다섯 번째로 청각이었던 것이다. 나에게는 다섯 번째 감각이 당연하고, 사람들은 보통 '육감'이라고 한다는 것을 그제야 떠올린 것이다. 이것에 대한 혼란을 느꼈던 이유는 NCT U의 <일곱 번째 감각> 때문이었다...(ㅋㅋㅋㅋㅋㅋㅋ) . 이야기의 후반부 쯤에 다다랐을 때는 이게 이거였다고?! 하며 충격을 금치 못했는데, 이렇게 이야기를 읽으니 신기하기도 하고... 당연시되는 것들이 배제되었을 때는 그것을 상상조차 하지 못하는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었다. 독서를 시작한 이후로 가장 충격적인 이야기 중 하나였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했다.가장 즐겁게 읽었던 것은 <스크립터>였다. 게임 속에 살고 있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이건 누구나 많이 해오던 상상 중에 하나기는 하다. 게임 속의 나. 혹은 게임 속에 숨어 NPC들 사이에 그들인 것 처럼 숨어사는 나. 이런건 영화나 만화로도 많이 등장하는 소재니까. 그런데 이렇게 글로 읽는건 처음이었다. 이 글이 최초라는 의미라기보다는 내가 소설로는 처음 접한다는 의미지만. 사람은 가장 인간적이지 않은 것을 통해 가장 인간적인 감정을 느낀다. AI가 잔인하거나 인간의 말을 듣는 노예이기를 바라면서 동시에 그들이 감정을 갖고 나와 공감하기를 원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 소설은 나에게 그렇게 다가왔다. 요즘 세상은 감정을 잃은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계속 부딪치다보면 언젠간 나에게도 감정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 이야기가 나에게는 그런 감동을 가져다 주었다.김보영의 소설은 스텔라 시리즈 때에도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었는데, 매번 감동을 받으면서 읽게 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제일 좋아하는 작가가 누구냐고 물을 때 답을 할 수 있는 작가가 한 명 더 늘었다는 것은 정말 기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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