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8.05. ~ 2024.08.15. (11)
떠도는 땅
김숨 저
은행나무 출판
2020년 04월 27일 출간
인간 존엄의 역사를 문학으로 복원하는 탁월한 힘
현대문학상·대산문학상·이상문학상 수상 작가
김숨 신작 장편소설 『떠도는 땅』 출간
현대문학상, 대산문학상, 이상문학상 등 국내 주요 문학상을 수상한 작가 김숨의 장편소설 『떠도는 땅』이 출간되었다. 올해로 등단 23주년을 맞은 김숨은 인간 존재의 근원과 존엄성에 대한 작품을 꾸준히 발표하며 문단과 독자의 많은 호평을 받았다. 인간 존엄의 역사를 문학으로 복원해온 그가 한국문학장(場)에 뜨거운 숨을 불어넣고 있다는 점에 이견은 없을 것이다. 특히 이번 신작은 고려인의 150년 역사를 응축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주목할 만하다.
『떠도는 땅』은 1937년 소련의 극동 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고려인 17만 명이 화물열차에 실려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된 사건을 소재로 삼고 있다. 화물칸이라는 열악한 공간을 배경으로 열차에 실린 사람들의 목소리, 특히 여성의 목소리를 빌려 디아스포라적 운명을 이야기로 확장시킨 이 소설은 슬픔과 그리움이 고인 시간을 걸어온 고려인들의 비극적 삶, 그리고 오랜 시간 ‘뿌리내림’을 갈망했던 그들의 역사를 핍진하고 섬세하게 그려낸다. 구상부터 탈고까지 총 4년이 걸린 작품으로 격월간 문학잡지 『Axt』에 연재했던 소설을 2년 6개월 동안 개고하였다.
“엄마, 우린 들개가 되는 건가요?”
“소돔은 성경에 나오는 땅이에요. 러시아 땅은 아니지요. 그럼요, 아니고말고요. 러시아가 아무리 넓다지만 세상 모든 땅이 러시아 땅은 아니니까요. 롯의 아내는 어리석게도 뒤돌아봐서 소금기둥이 됐지만 난 그러지 않았어요.”
“죽더라도 고향 가까운 데서 죽겠다는 날 기어이 열차에 태웠구나!”
“염소를 한 마리 버린 사람보다 세 마리 버린 사람이 더 억울할까?”
“네?”
“한 마리 버린 사람도, 세 마리 버린 사람도, 자신이 가진 염소를 전부 버렸으니 누가 더 억울한지 따지는 건 우습고 부질없어…….”
“하여간, 요새 젊은이들은 부모를 아주 우습게 알더군요.”
두꺼비 같은 손으로 얼굴을 긁던 풍도도 한마디 보탠다.
“그래도 조선인 마을에서 아들이 아버지 멱살을 잡았다는 소문은 못 들었는걸요. 제분소 앞에서 새파란 러시아 청년이 백발노인의 멱살을 잡고 뒤흔드는 걸 보고 기겁했잖아요. 둘이 부자지간이란 소릴 듣고 놀라 까무러쳤지요.”
백순이 핼쑥한 얼굴을 절레절레 흔든다.
“어디 멱살만 잡나요?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기도 하는 걸요!” 풍도가 말한다.
“에그그, 세상이 아무리 말세라지만 그러기야 하겠어요?” 소덕이 눈살을 찌푸린다.
“그랬지…… 한 부모 밑에서 난 형제끼리 편을 갈라 총을 들이대고 조상 대대로 살던 집을 불태우고…….”
황 노인의 목소리는 염소 울음소리처럼 떨려 나온다.
“‘사람은 먼저 사람이 돼야 한다.’ 할아버지가 생전에 누누이 하시던 말씀이랍니다. ‘사람 허울을 하고 있다고 다 사람이 아니다.’”
“내 어머니는 날아가는 새만 보면 손을 흔들며 말했어요. ‘새야, 너무 멀리 날아가지 마라.’”
“강물아, 너무 멀리 흘러가지 마라.”
“우린 너무 멀리 왔어요.”
“내 아버지 무덤에…… 보드카 한 잔 따라드리며 빌려고. 빌 데라곤 죽은 아버지뿐이네.”
“뭘요?”
“우리가 어디로 가든 굶어 죽지 않게 해달라고, 뿔뿔이 흩어지지 않게 해달라고, 그리고……”
“그리고요?”
“살던 곳으로 다시 돌아오게 해달라고.”
머릿수건을 두르다 말고 중얼거린다. “우릴 왜 멀리 내쫓는 걸까?”
“결국은 우리 땅을 빼앗으려는 수작 아니겠어요?”
“땅이요? 우리에게 땅이 있었나요?”
“돌밭을 감자가 나고 배추가 열리는 땅으로 일구었으니 우리 땅이지요.”
“그래서 땅에 명패라도 묻어두었나요?”
“나는 명패보다 더한 걸 묻었어요.”
“그게 뭔데요?”
“내 아버지요!”
“내 아버지 무덤은 라즈돌리노예 역 옆에, 내 어머니 무덤은 중국 훈춘에, 내 할머니 무덤은 함경북도 나진 고향땅에, 내 할아버지 무덤은 포시에트에, 내 마누라 무덤은 블라디보스토크 공동묘지에 있답니다.”
“경기도 의정부가 고향인 내 첫 마누라 무덤은 재피거우에 있지요. 의정부에서 태어난 사람이 죽어 재피거우에 묻힐지 누가 알았겠어요.”
“아, 내 무덤은 어디에 있을까!”
부모와 오빠들이 서둘러 자신을 이웃 총각에게 시집보내려 하자 올가는 야반도주하듯 집을 도망쳐 나와 무작정 신한촌으로 왔다. 강치수와 혼인신고를 하고 반지하방을 얻어 신혼살림을 차렸다. 변변한 직업이 없는 남편과 먹고살기 위해 담배 공장에 취직해 돈을 벌었다. 그녀가 아들을 낳자 강치수는 멜로르(Melor)라는 괴상한 이름 ─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 10월 혁명의 앞 글자를 조합해 만든 ─ 을 지어주었다.
“하늘에 뜬 게 달이에요, 해예요?”
“낮달이네요.”
“피죽도 못 얻어먹은 얼굴이네요.”
바람이 휘몰아쳐 들어와 열차 안에 고인 악취를 솎아낸다.
“저기도 러시아 땅이겠지요?”
“집이 한 채도 안 보이네요.”
“사람도요.”
“들짐승도 한 마리 안 보이네요.”
“날짐승도요.”
“그런데도 땅은 끝이 없네요.”
“솔직히 난 내가 누군지 모르겠어. 조선인, 러시아인, 소비에트 인민…….”
“그 셋 다 아닌가요? 당신은 조선인이지만 러시아에서 태어났어요. 러시아는 소비에트가 되었고요.”
“그 셋 다일 수는 없어.”
“‘하나님, 버터 1킬로하고 청어 2킬로만 주세요. 여유가 되시면 캐비어 500그램도요.’ 아침에 일어나보니 식탁에 삶은 감자하고 소금만 있더래요. 그래서 류바가 엄마에게 말했대요. ‘엄마, 스탈린 동지에게 기도하셨어야지요.’”
“상투를 튼 사내가 어린 여자애를 등에 업고 들판을 걸어가네요. 가마솥만 한 보따리를 머리에 인 여자가 사내 뒤를 따르고요…… 아기를 가졌는지 여자 배가 불러 있어요.”
“땅을 찾아가는 조선인들인가보구나.”
“나도 러시아 신민증을 받으려고 러시아 신부를 찾아갔지요. 차르 시절에 상투를 자르고 세례받은 조선인들에게만 신민증을 주었으니까요.”
“나는 일본 국적자이지요. 조선이 일본에 합병되어 조선 국적이 없어져서요.”
“우린 조선인이지만 소비에트 인민이거나 일본 국적자이지요.”
“내 아버지는 러시아로 귀화하지 않으셨어요. 돌아가시며 아들들에게 신신당부하셨어요. 절대 귀화하지 말고 러시아에서 조선인으로 살라고요.”
“바람, 비, 번개, 천둥, 진눈깨비, 죽은 새…… 하늘에서 내리는 모든 걸 맞으며 걸었어. 큰형이 물었어. ‘아버지, 우리는 어디로 가는 거예요?’ ‘땅을 찾아가는 거란다.’ ‘땅이요?’ ‘우리가 가진 씨앗을 받아줄 땅을 찾아가는 거란다.’”
“죽은 아기를 열차에 둘 순 없어요!”
“하긴, 열차에 전염병이 돌면 큰일이지요.”
“아기를 열차 밖으로 버려요.”
“땅에 묻어주게 둬요.”
“열차가 언제 설 줄 알고요.”
“죽은 아기 하나 때문에 우리 다 죽을 순 없어요.”
“우린 살아야 해요.”
“우리가 왜 살아야 하는데요?”
“왜요?”
“네, 왜요?”
“살아 있으니까요.”
“살고 싶잖아요.”
“새들은 죽을 때 슬피 울고, 사람은 죽을 때 착한 말을 한다지요.”
“아주머니, 나는 검은 머리카락이 싫었어요…… 그래서 가위로 머리카락을 자른 적도 있지요. 나는 검은색은 나쁜 거라고 생각했어요. 빨간 사과가 썩으면 검은색을 띠지요. 꽃들도 짓무르면 검은색을 띠고요. 검은 까마귀가 울면 사람이 죽어요. 러시아 여자들은 부모가 죽으면 검은 옷을 입지요. 죽음, 그늘, 부패, 썩은 웅덩이, 썩은 잎, 곰팡이, 그림자, 불 탄 나무, 불탄 집, 그믐밤…….”
“그믐밤이 있으니까 보름밤이 있는 거야. 검은색이 있으니까 흰색이 있는 거고. 잎이 썩으면 거름이 되지.”
우주를 배경으로 한 SF라고 생각했는데, 1937년 소련 극동지역에 거주하던 고려인 17만명이 화물열차에 실려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된 사건을 소재로 삼고 쓰여진 소설이었다. 일부러 책에 대한 정보를 찾아보지 않고 책을 펼치는 편인데, <떠도는 땅>을 읽으면서는... 사전정보 조사가 어느정도는 필요하겠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ㅋㅋㅋㅋ).
조선인들은 부모께 효를 다하고, 부모님이 돌아가시더라도 산소를 꾸준히 관리하고 제사를 지내며 부모님을 모신다. 자식들에게 자신들이 살아온 땅을 보여주고 그 땅을 물려주고 오래도록 터전으로 삼았던 땅을 자손에게 물려준다. 한국인이라고 다를까? 고려인이라고 다를까? 한국인은 조선에 뿌리를 두고 있고, 강한 민족성을 가진 동시에 너무나도 오래된 농도 짙은 문화 또한 가지고 있다. 현대 사회에는 그걸 본능적으로 거부하기도 하지만 어쩌겠는가. 500년이 넘는 세월동안 이 땅에 뿌리내렸던 문화와 역사와 전통이 한순간에 사라질 수는 없는 법인 것을. 우리에겐 너무 많은 일이 있었다. 일본의 침략, 세계전쟁, 사상으로 인한 분리, 한 민족간의 전쟁, 분단, 개발, 급성장. 우리는 한 세월도 편히 쉬지 못하고 너무나도 빠르게 너무나도 많은 변화를 끌어안고 성장했다. 우리라고 그러고 싶어서 그랬을까. 그리고 대한민국에 거주하는 사람들과는 다르게 살아온, 우리와 같은 뿌리에서 뻗어나온 이들이 여전히 분명히 존재하고, 그들은 또한 그들의 아픔을 가지고 있다.
이 책은 고려인들의 강제이주를 이야기하며 그들이 어떤 고통을 겪었으며, 어떤 심리적 불안을 가지고 있는지, 어떤 슬픔을 가지고 있는지, 어떤 비극적인 삶을 살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간신히 자리를 잡고 살아왔다고 생각했으나 집과 재산을 모두 빼앗기고 터전을 떠나와야 했던 사람, 여전히 조선에서의 삶을 잊지 못해 부모님의 묘를 임시로 만들어놓고 모셨으나 그마저도 잃고 떠나야만 했던 사람, 자신의 정체성이 조선인인지 소련인민인지 러시아인인지 혼란스러워하는 사람, 유일하게 붙잡을 끈인 남편과 아이를 잃고 방황하는 사람, 부모를 잃고 홀로 떨어져 열차 안에 갇힌 사람. 너무나도 많은 슬픔이 이 책에서는 아무렇지 않은 듯 적혀져 있다. 아무렇지 않은 듯 적혀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냉정하게 쓰여졌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너무나도 직설적이고 노골적으로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에 읽는 독자로서는 더 강렬하게 그들의 현실을 직시할 수 있었다.
책소개를 보면 '디아스포라적 운명을 이야기로 확장시킨...'이라고 설명하는데, 나는 이걸 그저 디아스포라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물론 디아스포라적인 뿌리를 가지고 있는 이야기지만, 조금 방향이 다른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부분으로 아는게 적으니 조금 더 책을 찾아보는 수밖에 없겠으나 ... 책을 찾아보진 않았따 (ㅎㅎ)
사람은 뿌리를 내리지 않고도 살 수 있다. 사람은 걸어 나아가며 산다. 한 자리에서만 머무르지 않는다. 인간은 식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조선인은 뿌리를 찾는다. 내 부모, 내 형제, 내 조상, 내 고향, 내 터전, 내 나라. 그런 것들을 찾는다. 이 책은 그런 것들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사람이 보기에는 너무나도 마음 아픈 실제 사건, 그것도 강제적으로 머물 터전을 잃게 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기에 슬픈 이야기였다.
우리는 너무 많은 아픈 역사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그럼에도 우리가 가진 역사 때문에 서로를 믿고 의지하지 못한다는 점이 슬프다. 너와 내가 비슷한 고통의 시작점을 가지고 각자 다른 삶의 형태를 가지게 되었으니, 우리는 서로를 인정하고 사랑하면 된다고 답할 수 없게 되었다는 점이 가장 슬픈 것 같다.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는 책인 것 같아서 꼼꼼하게 정말 열심히 마음에 한 자, 한 자 담아가며 읽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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