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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독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 <당신에게 가고 있어>, <미래로 가는 사람들> 김보영

2024.06.13. ~ 2024.06.13. (1)
2024.06.13. ~ 2024.06.13. (1)
2024.06.13. ~ 2024.06.13. (1)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 <당신에게 가고 있어>, <미래로 가는 사람들>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

김보영 저
새파란상상(파란미디어) 출판
2020년 05월 26일 출간

소설/시/희곡 > 과학소설(SF) > 한국 과학소설


김보영 작가의 SF ‘스텔라 오디세이 트릴로지’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 『당신에게 가고 있어』, 『미래로 가는 사람들』이 출간되었다. 『당신에게 가고 있어』는 이번에 새로 선보이는 신작이고 다른 두 작품은 기 출간작의 개정판이다. 세 작품은 모두 우주여행을 주제로 담고 있으며 무한한 우주를 항해하는 동안 변화하는 시간과 공간이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게 되는지를 가슴 따뜻한 울림으로 표현하고 있다.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 『당신에게 가고 있어』는 두 남녀의 편지로 구성되어 있는 서간문 형식의 소설이다.


뱃사람들은 이 항로를 ‘기다림의 궤도’라고 불러. 태양을 중심으로 나선을 그리며 돌다가 출발한 곳으로 돌아오지.

우주에 나오면 별을 잔뜩 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결국 유리 너머로 보니까 뭐 보이는 게 있어야지. 밤에 집 안에 있으면 바깥 안 보이잖아. 우주는 늘 밤이고. 하지만 괜찮아. 겨우 두 달인걸.

어디로 가든 지금보다는 나을 거야. 다른 성계 이민자에 대한 차별도 많이 줄어 있을 거고, 복지 제도도 연금 제도도 좀 개선되겠지. 지구에 다글거리고 사는 사람들이 바쁘게 뛰어다니며 만들고 뜯어 고치고 나면 우리가 돌아가서 누리는 거지. 이런 걸 손 안 대고 코 푼다고 해야 하나.

너 없이 석 달이나 더 살 생각은 꿈에도 없었어.

문득 전에 했던 생각이 났어. 시간을 넘는 건 공간을 넘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갑자기 깨달았어. 나는 집에 돌아갈 수 없다고. 내가 떠났을 때 집은 사라졌으니까. 과거의 어느 시간대에 남겨졌고 이제 다시는 돌아갈 수 없다고.

저번처럼 총 든 사람들이 우리를 모아 놓고 설교를 했어. 주장하기로는 자기들이 안 왔으면 우린 다 죽었대. 뭐, 그런가 보다 했어. 과거에서 온 놈들은 뭐 아는 게 없다고 화를 냈어. 그 사람들 말이 자기들은 자경단인데, 시간 여행자를 노리는 도적 떼가 항구를 배회하니 다신 오지 말라는 거야.

우리보고 운이 좋다고 했어. 뭐가 좋은지 모르겠어. 과거에서 오는 바보들을 지켜 주는 건 자기들뿐이래. 그러면서 우리 가방이며 배를 뒤져 싸그리 가져갔어. 정말 괜찮은 사람들이었을지도 몰라. 남겨 달라고 애원하는 건 놓고 갔으니까. 나는 간신히 당신 주려던 노래반지 하나 건졌어. 진짜 보석 아니라고 장난감이라고 눌러서 노래를 들려줬더니 ‘내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하는 구절이 나오지 않겠어. 피식 웃고 이마에 툭 던지고 가더라.

선장과 승무원은 다른 별로 간다고 했어. 나는 5년 뒤의 이 항구에 와야 한다고 했어. 신부가 오고 있다고. 예식장도 잡아 놨다고 했지. 친구들한테 사은품도 벌써 돌렸다고.
내가 불쌍해 보였나 봐. 배 안에서 작은 배 하나를 꺼내 주더라. 한 20세기쯤에 만들었을 것 같은 배였어.
“단순한 게 튼튼해.” 선장이 그러더라.
방 한 칸쯤 되는 배인데 혼자 지내기엔 괜찮아 보였어. 선장이 이걸로는 오래 못 버틸 테니 적당히 하고 어디든 정착하래. 내가 괜찮다고, 백수 시절엔 방에서 한두 달쯤 게임만 하며 밖에 안 나간 적도 있다고 했어. 그러니까 선장이 내 어깨를 지그시 누르면서 가만히 앉히는 거야.
그리고 공책을 펴더니 그림을 그려 가며 일러 주는 거야.
이 배로는 다른 성계로 갈 수 없다고 했어. 이건 돛단배고 돛단배로 태평양을 건너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내가 다른 성계에 갈 일이 없다고 했어. 아내가 오고 있는데……까지만 말했는데 또 알았다면서 말을 끊더라고. 태양풍과 태양전지로 가속한다고 했어. 목성 궤도를 타라고 했어. 중력이 추진을 도와줄 거라고. 그리고 그걸로 얼마나 추진력을 얻을 수 있는지도 계산해 줬어.
배가 견딜 수 있는 가속도도 계산해 줬어. 내 몸이 견딜 수 있는 속도도. 이것저것 다 따지면 최대 추진은 중력가속도일 거라고 말해 줬어.
중력가속도가 무슨 말인지 생각이 안 나더라. 선장은 반올림해서 1초에 10미터라고 했고, 광속은 반올림해서 1초에 30만 킬로미터라고 했어. 내가 여전히 멍하니 있으니까 내 배로 광속에 이르려면 1년은 가속해야 한다고 말해 줬어. 5년 뒤로 가려면, 아니, 몇 년 뒤로 가든 가속과 감속 시간을 합해 2년이 걸린다고.
그리고 그럴 수 없을 거라고 했어. 배에 2년 치의 식량을 실을 수 없다고. 2년 치의 식량을 실어도 그 전에 상하고 말 거라고. 2년 치의 식량을 실으면 배가 날 수 없을 거라고도 했어.

밥통을 주면서 그 사람이 내가 천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행운아라고 했어. 안 그랬으면 다음 항해에 죽었을 거래. 무슨 생각으로 이 쪼그만 배를 타고 항해할 생각을 했냐는 거야. 아무 생각도 없었다니까 그럴 것 같았대.

언젠가 방에서 한 발짝도 안 나오고 몇 달 살았던 적도 있다고 했었지?
이제 알 것 같아. 그건 혼자 산 것이 아니었어. 난 한 번도 혼자 살았던 적이 없어. 누군가는 내가 내놓은 쓰레기를 치워 갔고 정화조를 비워 주었어. 발전소를 돌리고 전기선을 연결하고 가스를 점검하고 물통을 갈고 하수관을 청소했어. 어느 집에선가 면을 삶고 그릇에 담아 배달하고 다시 그릇을 가져가 닦았어. 나는 한 번도 혼자 살았던 적이 없어. 내가 무슨 수로 혼자 살 수 있단 말야?
그저 살아 있었다는 것만으로 나는 혼자가 아니었던 거야.

당신은 오지 않았어.
밤이 새도록 기다리고 다음 날에도 기다렸지만 당신은 오지 않았어.
나는 들판에 누워 별이 뜨고 지는 것을 보았어. 지구가 별바다를 흘러가는 것을 보았어. 엄청 큰 배에 타고 있다고 상상했어. 사실이기도 하고. ‘괜찮아.’ 나는 생각했어. ‘한 시간쯤 걸리는 거리라면 10분쯤 늦을 수도 있잖아. 10년 거리면 1년쯤 늦을 수도 있지.’
정말로 1년을 기다린 건 아냐. 하지만 4개월 하고 3일을 기다렸어. 잠은 배에서 자고 밥통에 흙을 갈아 먹으며 살았어.
당신은 오지 않았어.
그런데 왠지 슬프지 않더라. 기쁘지도 않았지만.
그저 담담했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처럼 느껴졌어. 당신이 갈댓잎 사이에서 나타나기라도 했다면 ‘와, 뭐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다 있나. 이상하니까 집에 갔다가 다시 와.’ 했을 거야.
그런 뒤에 나는 떠났어.
사실 떠날 이유는 없었어. 더 이상 미래로 갈 이유는 없었으니까. 하지만 남아서 뭘 해야 할지도 알 수가 없었어. 오염이 사라지고 사람이 살 만해진 미래로 가자고 생각했어. 그 뒤는 생각하지 않았어. 생각할 만한 마음이 없었어.
여기가 아니라면 어디든 좋다고 생각했어. 이 모든 것을 떠올리지 않아도 되는 곳으로. 당신을 포함해서.

왜 살았는지는 모르겠어. 하지만 생각해 보면 왜 죽으려 했는지도 모르겠더라. 아니, 더 생각해 보니 사람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죽는 거더라고. 그 도시처럼. 뭔가를 해야만 살 수 있는 거야. 의지를 갖고, 지치지 않고.
어느 날 잠이 깼는데 숨이 답답한 거야. 창을 열어야겠다고 생각했어. 창을 열고 바람을 좀 쐬어야겠다고. 밖은 밤이더라. 어지간히 늦잠을 잤구나 생각했어. 일 났다, 오늘 결혼식인데. 준비할 것도 많은데. 나는 창으로 가서 문을 열려고 했어. 안 열리더라. 무슨 놈의 창이 손잡이도 없는 거야. 그래서 나는 바지 주머니에 넣어 둔 공구를 꺼냈어. 이걸로 깨서 열어야겠다고 생각했어. 와, 1분만 더 창을 닫고 있다간 숨 막혀 죽을 것 같았거든. 환기를 안 한 지 얼마나 됐는지, 방에 내 땀내며 지린내 같은 게 진동하고 있었거든. 창을 치려다가 다른 손으로 내 손을 붙들었어. 바들바들 떠는 손을 붙들고 정신이 들 때까지 웅크리고 있었어.
내가 여기에 있어.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
그 생각을 하지 않았다면 자제하지 못했을 거야.
그러니까 당신이 나를 살린 거야. 당신이 지금 어느 시대에 있든, 이미 죽었든, 살았든, 무한의 별 무리를 여행하고 있든.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
당신이 이미 이 세상에 없다 해도.

“여기서 아기를 낳자.” 당신이 말했어.
내가 웃었어. “여기서?”
“빛의 속도로 흘러가는 이 세계에서. 시간이 흐르지 않는 세상에서. 그러면 그 아이는 그게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거야. 그 시간선이 그 애의 고향일 테니까.”
당신이 내 귀에 속삭였어.
“오히려 느리게 흘러가는 다른 시간선이 부자연스럽다고 생각할 거야. 그 애는 우리처럼 다른 시간대에 이를 때마다 무서워하거나 낯설어하지 않을 거야. 당신이 스물에서 스물한 살이 되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던 것만큼이나, 천 년이나 2천 년의 세월을 넘는 것을 자연스럽다고 생각하겠지. 지나간 시간을 서러워하지 않을 거야. 사라져 가는 것들을 보며 울지 않을 거야.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로 생각할 거야. 그 애는 우리처럼 더듬거리지 않을 거야. 중력에 묶여 방황하지도 않겠지. 무한의 끝까지도 나아갈 거야. 우리가 볼 수 없는 모든 것을 보게 될 거야.”
그래, 괜찮을 거야.
우리가 만날 수만 있다면.

노란색이었어.
색이 남아 있다는 건 창에서 들어오는 햇빛에 색이 바래지 않았다는 거야. 어릴 때 창가에 놓아둔 책들을 떠올렸어. 몇 년 가지 않고 표지가 하얗게 바랬었는데.
종이를 커튼에서 떼어 냈어. 잘 안 떨어지더라. 접착제가 아직 남아 있다는 뜻이었어. 작년이었을까? 한 달 전? 어제?
방금?
해가 기울며 창에 걸쳐졌어. 창에 걸쳐진 해가 은빛 커튼을 드리우며 안에 있는 것들이 다 모습을 드러냈어. 비질을 한 바닥, 새로 종이를 얹은 제단, 제단에 놓인 꽃병, 누군가가 불을 피운 흔적이며 그 위에 얌전히 놓인 양은 냄비까지. 사람이 밟고 오간 발자국이며 이부자리 흔적까지.
바람이 불어와 삭고 낡은 종이가 우수수 떨어졌어. 햇빛이 내려앉아 글씨를 황금빛으로 비추었어.


잘 지냈어?
나 지금 가고 있어.


당신과 결혼하고 싶었는데,
당신과 네 배 더 가족이 되고 싶었는데, 다 틀렸나 봐.
그래도 나는 지구로 가려 해.
내게 무슨 다른 선택이 있겠어? 내 집은 당신뿐인데.
기다려 달라는 말은 차마 못 할 것 같아.
그저 항구에 나와 줘.
11년 뒤에 나를 마중 나와 줘. 아내하고 애들 데리고 와도 돼. 괜찮아. 뭐, 다 이해할게. 의연하게 악수하고 같은 남자한테 코 꿰인 비슷비슷한 여자들끼리 종일 수다나 떨지, 뭐.
그저 당신을 만나고 싶어.
그럼 다 괜찮을 것 같아. 같은 하늘 아래에 당신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 그러면 우린 떨어져 있어도 같이 사는 거지, 뭐. 집이 좀 클 뿐이지.

그런 날이 올까.
앞으로 수십 수백 년이 지나, 얼음이 녹아 교회가 모습을 드러내고, 그때 당신이 우연히 예식장에 갔다가 내 메모를 볼 날이 오기는 할까.
그때에 그 종잇조각들이 당신에게 위로가 되기는 할까.

나는 물들지 않으려 해.
나는 물들지 않으려 해.
물든다 해도 얻는 것이 없으니.
그것만 잘해도, 당신을 만났을 때 잘살았다고 자랑할 수 있을 것 같아.

나는 아이를 낳으면 이 빛의 길 위에서 낳고 싶어. 힘센 사람도 간악한 사람도 공기방울처럼 부드러워지는 이곳에서. 세월이 빛처럼 흘러가 사라지는 이 길에서.
그러면 그 애는 영원히 고향을 잃지 않을 테니까.
우리 아이는 잃을 것이 없을 거야. 저 선장처럼, 이 배의 승객들처럼, 잃어버린 고향을 되찾겠다고 자신을 망치고 세상을 망치려 들지 않을 거야.
그 아이는 고향을 잃지 않을 거야. 이 빛의 길이 그 애의 고향이 될 테니까.
그렇게 하자……. 우리가 만나게 되면.

왜 그런 말 있잖아. 우리가 누군가를 기억하는 한 그 사람은 죽지 않는다는 말. 누군가를 기억하면 그 사람은 우리와 함께 살아간다는 이야기 말이야.
만약 정보가 인격일 수 있다면,
내 기억 속의 당신도 인격일 수 있는 거야.
그게 사실이라면,
그게 사실이라면 당신은 지금 나와 함께 살고 있는 거야. 내가 당신을 기억하니까.
나와 함께, 나라는 이 생체 컴퓨터 안의 정보 데이터로서.
그러니까 내가 살아 있는 한 당신은 살아 있는 거야.
그래서 나는 계속 살고자 해. 당신을 살게 하기 위해서. 내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당신을 살게 하기 위해서.
당신이 세상에 존재했다는 증명이자 흔적이 바로 나니까. 내가 당신의 유적이니까.
고마워, 내 사랑.
아침에 눈을 뜨면서 속삭여. 밤에 잠이 들면서 속삭여. 내 안에 있는 당신에게 속삭여.
나와 함께해 주어서 고맙다고. 이렇게 나를 살게 해 주어서 고맙다고.
당신이 나를 살게 하는 거야. 지금 당신이 어디에 있든. 죽었든, 살았든, 무한의 별 무리를 여행하고 있든.

그때였어.
고개를 돌리는데 저 멀리 이상한 것이 눈에 들어왔어.
모래를 꾹, 꾹 찍어 누른 자국이 점점이 숲까지 이어졌어. 툭, 툭 떨어진 물방울에 모래가 뭉쳐 있었지.
사람 발자국 같았어.
젖어 있었어.
젖어 있었어.
마치 금방 생겨난 것처럼.
조금 전 누군가 부서진 우주선에서 빠져나와 이 해안가로 힘겹게 헤엄쳐 나온 것처럼. 젖은 몸을 간신히 일으켜 느릿느릿 이 모래사장을 걸어 나간 것처럼.
축축한 흙 발자국이 도시를 향해 가고 있었어.
삶에 온통 두들겨 맞은 양 노곤해 보였지만 아직 생기를 잃지 않은 걸음걸이였어. 파도가 하얀 거품을 일으키며 밀려와 흙 발자국을 지워 내었어.
나는 일어났어.
젖어 달라붙는 옷을 추스르며 발자국을 따라 걷기 시작했어.
그러다 달리기 시작했어.
모래를 박차고 뛰기 시작했어.
기다리고 있어.
내가 여기 있어.
내가 지금 가고 있어.


청년이 셀레네의 방으로 미끄러져 들어오는 솜씨는 흠잡을 데 없이 훌륭했고, 공중에서는 깃털 소파에라도 앉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정지했다. 셀레네는 이 꼬마가 자신과 비슷한 종류의 인간이라는 것을 금방 알아차렸다. 중력이 아니라 우주에 묶인 인간이라는 것을. 지구의 중력에 묶여 있는 사람이 이곳에 머물게 되면, 며칠 지나지 않아 얼굴이 부어오르고 뼈에서 칼슘이 빠져나간다. 그들은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어머니의 품을 헤집어 찾듯이 아우성치며 지구로 내려간다. 반대로 만약 셀레네가 지구로 내려간다면, 당장 몸을 가눌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피가 아래로 몰려 빈혈을 일으키고, 뼈가 하중을 이기지 못하고 조각조각 부서져 나갈 것이다. 무거운 대기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심장이 아우성치고 몸이 짓눌려 버린다. 인간이 지구에 묶여 있듯이, 그녀는 우주에 묶여 있는 존재였다.

“문명의 죽음이나 한 사람의 죽음이나 비슷한 거야. 사람의 영혼이 윤회의 고리 속에서 다시 태어나는 것처럼, 문명의 영혼도 다시 태어나. 아이는 늘 부모보다 나이가 많아. 뇌는 기억하지 못해도 그 유전자에는 새겨져 있으니까. 인류는 조금씩 성장하고 있어. 언젠가는 영생하는 문명을 창조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할 거야.”

 

우주의 모든 것이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변하게 되니까. 그래서 우리에게 이 우주는 무한한 거다. 자신이 있던 곳으로 되돌아와 봤자, 그곳은 완전히 다른 세계니까. 우주는 서로 마주 보고 있는 거울 같은 거라고 보면 돼. 수십만 개의 거울이 무한히 서로를 비추는 거야. 우주가 멀어질수록 조밀해지는 이유는, 거리가 멀어질수록 빛이 비추는 영상이 늘어나기 때문이야.

“같은 역사가 두 개의 별에서 이중으로 진행되었어요. 마치 평행우주를 하나 만들어 낸 것처럼. 도시가 만들어졌고, 멸망했고, 살아남은 사람들이 원시시대에서부터 다시 시작했어요. 다시 갔을 땐 그곳도 인간이 살 만한 행성이 아니었어요.”
“인간은 어딜 가든 마찬가지야.”
예상한 일이라는 듯 셀레네가 중얼거렸다.

“그건 마약 같은 것이지. 한번 시작하면 멈출 수가 없거든. 돌아왔다가는 다시 떠나고, 돌아왔다가는 또다시 떠나고. 미래에는 뭔가 더 나은 것이 있을 거다. 그 실낱같은 희망을 버리지 못하고. 도박장에 전 재산을 쏟아 붓듯이 인생을 쏟아 붓지. 돌아왔을 때엔 신분증도 연고지도 기다리는 사람도 없어. 미래로 가면 갈수록 정착할 수 없게 되어 버리는 거야. 점점 늪으로 빠져드는 거지. 결국은 영원히 여행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는 거야. 저주받은 유령선 선장처럼. 땅에 발을 디딜 수 없는 저주.”

그는 건배하는 자세로 술잔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그게 우리들이지. 《시간 여행자》.”
마지막 말은 성하를 부른 것이었다.

“나는 신이 아니야.”

성하는 노야의 귀에 속삭였다.
“당신과 같은 사람이야.”
무슨 말을 하든 상관없었다. 둘러싼 이들은 그가 신에게서 무슨 메시지를 받는지 몰라 섣불리 움직이지 못했다. 그의 언어는 그 뜻도 알려지지 않은 채 일종의 기도문이 되어 전해질 것이다. 어차피 남겨질 것이라면 그런 문장인 편이 좋을 것 같았다. 그러면 어느 시대에 어느 현명한 인간이 그 의미를 알아내 줄지도 모르는 일이다.

“좋아, 친구. 《우주의 끝》에 온 걸 환영한다.”

몇 시간 뒤에 까마득한 차원 너머에 있는, 오래전 성하라는 인격 조각의 ‘육체’였던 것에 죽음이 찾아왔지만, 너무나 미미한 일이라 느낄 수조차 없었다. 그는 모든 인간이 죽음을 통해 이와 비슷한 일을 겪게 된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죽어 가는 우주의 바깥에 수많은 새로운 우주가 태어나고 있었다. ‘영혼’은 이제 그중 한 우주를 택해 이동했고, 다시 그 우주와 하나가 되었다. ‘영혼’의 내부에서 가스 성운이 회전하며 새로운 우주가 태어났다. 천억 개의 우주 안에 천억 개의 은하계가 태어났고, 은하계마다 140억 개의 태양이 태어났으며, 각각 1억 개의 지구가 만들어졌다.

무한의 시간 속에서 자신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을 지켜보던 ‘영혼’은 어느 순간, 이동을 거꾸로 시도했다. ‘영혼’은 그 이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고, 아무 두려움도 느끼지 않았다. 그는 오랜 옛날부터 이런 방식으로 자신을 성장시켜 왔던 것이다. 우주 전체를 감싸고 있던 영혼의 조각들이 점점이 흩어져 1억 개의 지구에 쏟아져 내렸다. 그중 하나의 조각은 아직 태어난 지 얼마 안 되는 푸른 별의 바다에 떨어졌다. 영혼조각은 번개가 치는 걸쭉한 유기바다 속으로 빨려 들어갔고, 조용히 활동하기 시작했다. 이 작은 별 가득히 자라나게 될 수많은 생물과, 앞으로 펼쳐질 그들의 찬란한 삶을 꿈꾸며.


일년이 넘도록 이어지던 독서의 축복이 사라지고 있다고 생각할 쯤... SNS에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의 영화화가 예정되어 있다는 추측용 기사가 뜨면서 이 책에 대한 줄거리가 여러모로 많은 공유를 받았다. 우주를 떠돌며 약혼자를 기다리는 사람의 이야기라고 했다. 너무나 낭만적이고 SF적인 이야기가 아닌가? 싶은 마음에 바로 전자책을 알아봤다. 알아보니 <스텔라 시리즈>라고 하여 총 세 권의 책이 묶여져 있었다. 실제로 책을 읽는 순서는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 <당신에게 가고 있어>, <미래로 가는 사람들> 이라고 하는데, 알라딘의 책 번호순 정렬에 의해서는 <당신에게 가고 있어>,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 <미래로 가는 사람들> 순으로 되어 있었다. 가나다 순으로 된건가 싶기도 하고... 처음에 <당신에게 가고 있어>를 폈다가 표지에 2 라고 적혀있었던 탓에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를 먼저 펼칠 수 있었다.

해외 여행을 가듯 우주 여행을 하여 우주를 횡단할 수 있을 정도의 기술력을 가진 미래를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각 편은 남자, 여자, 그리고 그 미래를 배경으로 한다. 책이 150페이지 미만으로 얇은 편임에도 불구하고 그 사이에 아주 많은 일들을 겪고, 그것이 몇 일, 몇 주, 몇 달, 심지어는 몇 년의 시간까지 흐르게 된다. 결혼식을 하기 위해서 우주를 여행했을 뿐인데, 이들은 우주 위를 떠돌며 우주에서 시간을 흘려보내고, 시간을 잃고, 시간을 강제로 보내게 된다. 늙지 않거나, 혹은 아주 늙어버리거나, 너무 많은 고생을 하며 그저 약혼자를 기다리고 만나러 떠나는 두 남녀가 너무나 애틋하게 느껴졌다. 그럼에도 사실 나는 이정도로 연인을 사랑하는건가? 중간에 연인을 포기할 뻔 했으면서도? 그러면서도 이렇게까지 약혼자를 놓지 못하는 이유는 너무 흘러버린 세월 속에서 어쩔 수 없이 동아줄마냥 잡고 있을만한 것이 약혼자 뿐이어서 그런게 아닐까...? 하는 우울한 생각까지 했지만 결론적으로 마지막 이야기가 너무나도 로맨틱하고 아름다웠다. 아, 나는 현실에 찌든 현대인이구나(광광). 하는 결론을 내렸을 정도로...

서로를 사랑했기에 결혼을 다짐했고, 그렇게 아주 긴 시간을 약혼자와의 결혼식과 약혼자와 함께 살아갈 시간을 떠올리는 주인공들의 이야기였고, 이 이야기는 실제로 김보영 작가의 팬들이 프로포즈용 소설을 의뢰한 것이었다! 그래서 이 소설의 전말과 탄생 과정을 알게 되니 너무나 로맨틱하고 이 소설의 주인공들이 너무 부러워지는 것이었다((˘̩̩̩ε˘̩ƪ) !!!게다가 마지막 이야기인 <미래로 가는 사람들>은 이 부부의 자식을 위해 쓰여진, 그러니까 그 후세를 위해 쓰여진 글이라고 해서 더 미묘하면서도 감동적인 마음으로 읽을 수 있었다.오랜만에 읽은 SF였는데 역시 나는 SF가 취향이구나 싶었다. 로맨스를 좋아하지 않음에도 SF로 로맨스를 읽으니까 심장 떨려 미쳐하는 나의 모습이 ... SF광인이라고밖에는 설명할 수 없었다... 너무 재미있는 시리즈였고, 김보영 작가의 다른 책도 너무 궁금해지게 만드는 이야기였다. 게다가 나는 편지형식의 소설을 그닥 좋아하지 않는데도 꽤나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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