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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독서

<오로라> 최진영

2024.04.14. ~ 2024.04.14. (1)

오로라

최진영 저
위즈덤하우스 출판
2024년 02월 21일 출간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구의 증명》 《단 한 사람》 《해가 지는 곳으로》 등을 쓰고 2023년 〈홈 스위트 홈〉으로 이상문학상을 수상하며 사랑의 다채로운 면면을 재발견해온 최진영의 신작 소설 《오로라》가 위즈덤하우스의 단편소설 시리즈 위픽으로 출간되었다. 2022년 제주 생활을 시작한 작가가 “조커 카드로 아껴두겠다고 다짐했었”던 제주도를 처음으로 배경 삼은 작품이기도 하다.

제주는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곳, 자유를 느낄 수 있는 곳, 스스로를 죄는 규칙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곳이다. 죄책감 대신 자유, 진실 대신 거짓을 택하고 ‘오로라’로 다시 태어나기를 다짐한 ‘너’를 비웃듯 발코니에서 죽은 새가 발견된다. 봄이 오면 녹아 사라질 걸 알면서도 눈사람을 만드는 마음으로 한 사람의 손을 잡는다. 종잡을 수 없는 겨울 제주의 날씨만큼이나 변화무쌍한 사랑이 날개를 펼치고 날아오른다.


당신 없이는 내 마음도 없어요. 알 수 없어요.

이런 내 마음을 부디 아무도 모르기를 바랄 뿐.

깊은 외로움이 발끝에서부터 올라온다. 너는 지긋지긋하다고 중얼거린다. 너는 이번 여행에서 시험하고 싶은 것이 있다. ‘나는 과연 숨을 수 있는 사람인가’ ‘얼마나 철저하게 숨을 수 있을까’ 너는 그것을 알아보려고 이곳에 왔다. 그러므로 이 여행은 억지가 아니라고, 마음을 다잡자고 생각한다.

……하긴, 어떤 믿음에는 이기적인 구석이 있지. 너는 믿음에 깃든 이기심을 되새긴다. 당신이 반드시 돌아오리라는 믿음은 오직 나를 위한 마음. 당신을 끝까지 믿는다는 말은 나를 절대 배반하지 말라는 요구. 그러므로 믿는 마음에는 이기심보다 큰 외로움이 숨어 있다. 먼저 떠나지 못한 사람이 멀어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홀로 되삼키는 울음이 있다. 너는 남겨지는 사람이 되지 않으려고 이곳까지 왔다. 믿지 않으려고 훌쩍 떠났다.

너는 발코니에 서서 수평선을 바라본다. 밤의 하늘과 바다는 경계가 모호하고, 너는 거짓말의 자유를 생각한다. 이 섬에 너를 아는 사람은 없다. 네가 거짓을 말해도 거짓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없다. 너는 이 섬에서 최유진이 아닐 수 있다. 누군가 이름을 물어본다면 ‘오로라’라고 대답할 것이다. 오로라는 한때 네가 무척 갖고 싶었던 이름.

너는 비밀에 지쳤다. 그것이 너무 지긋지긋해서, 너를 갉아먹고 흩트리고 하찮게 만드는 것만 같아서 그만두려고, 너에게 무엇도 요구할 수 없도록 완벽하게 숨어버리려고 이곳에 왔다. 지난밤 너는 연극을 했다. 연극하듯 살면 숨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서울에서의 삶은 연극이 아니었던가? 너는 때로 연기하듯 거짓말하고 감추고 기만했다. 몰랐다는 말은 소용없다. 알게 된 다음에도 그만두지 않았으므로. 멈추려는 시도로는 부족하다. 분명하게 멈추어야 했다. 그것만이 네 결백을 증명할 수 있지만, 결백이 무슨 소용인가? 이미 사랑해버린 것을.

너는 방바닥에 누워 발코니를 바라본다. 잠든 너와 죽은 새의 눈높이는 비슷했을 것이다. 어딘가에서, 밤마다 새가 죽는다. 사람이 죽는다. 이별한다. 운다. 사랑한다고 말한다. 믿음 없는 사랑은 가능하다. 사랑 없는 믿음은 비참하다. 사랑이 제일이란 말을 수긍할 수밖에 없다. 너는 핸드폰을 꺼내 문장을 적어 너에게 보낸다.

어두운 벌판을 둘러보던 너는 근처에 가로등 하나 없음을 알아채고, 충동적으로 플래시를 끈다. 어떤 마음인지 알 수 없는 그도 너를 따라 헤드 랜턴을 끈다.
완벽한 어둠.
겨울바람 소리.
어둠의 내부에 있는 것만 같다.
흔들리며 안겨 있는 것만 같다.
죽은 새가 되어 땅에 묻힌 것만 같다.
새뿐이겠는가. 숱한 죽음이 묻혔을 것이다. 땅속뿐이겠는가. 우주 또한 생명 없음으로 가득하다. 아래위 무한한 죽음 사이에 실오라기 같은 대기권이 있고, 생명이 있고, 거센 바람이 분다. 너는 휘청거린다. 그가 너의 팔을 잡는다. 너는 주저앉는다. 그는 손을 내민다. 너는 그의 손을 잡고 일어선다. 랜턴을 밝히려는 그에게 말한다.
불을 켜지 않으면 좋겠어요.
그는 네 말을 따른다.
흑백영화 같은 어둠 속을 걷는다.
그가 앞서고 너는 따른다.
손을 놓지 않고 가로지른다.

함부로 다정하게 굴지 마세요. 외로운 사람을 오해하게 두지 말아요. 내 눈을 빤히 바라보지 마. 사냥하듯 사랑하지 마. 잘못을 실수라고 말하지 마.함부로 다정하게 굴지 마세요. 외로운 사람을 오해하게 두지 말아요. 내 눈을 빤히 바라보지 마. 사냥하듯 사랑하지 마. 잘못을 실수라고 말하지 마.

너는 너의 죽음을 상상한다. 심장이 아프진 않고 다만 슬프다. 너는 와인을 한 모금 마시며 죽은 새를 생각한다. 네 시신을 쓰레기봉투에 버리면 불법이다. 아무 곳에나 묻어도 불법이다. 네 시신을 합법적으로 처리해줄 사람은 누구인가…….

확인하고 싶은 마음과 완전한 이별이라. 그건 마치…….
그가 위스키 잔을 가볍게 돌리며 중얼거린다.
우리는 새를 묻었죠.
그의 목소리가 돌연 작아진다. 그의 말을 놓치지 않으려고 그를 향해 너는 몸을 깊이 기울인다.
그 새가 진짜 죽었는지 확인하려고 땅을 파보는 것과 다르지 않은 것 같은데요.
너는 다시 그 밤의 어둠과 거센 바람 소리를 떠올린다. 새는 죽었다. 차게 식었다. 깊이 묻었다. 땅을 파서 확인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너 혼자만의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와 함께 했고 그가 기억한다. 정말 죽었느냐고 물어본다면 대답해줄 사람이 있다. 전화가 온다. 망설이던 너는 통화 버튼을 누른다. 상대의 말을 듣지 않고 너는 말한다. 아직도 모르겠어? 우린 끝났어. 다신 나를 찾지 마. 이젠 네가 죽어도 그 사실을 모르고 살 거야.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른 뒤 전원을 끈다. 전원을 꺼버리는 방법도 있음을 이제야 깨달은 사람처럼. 그뿐인가. 그의 전화번호를 차단할 수도 있었다. 전화를 받지 않고 답장을 보내지 않는 방법으로, 너는 계속 확인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가 너를 여전히 찾고 있음을. 그러므로 이 낯설고 커다란 섬에 숨으면서 네가 진짜 원했던 것은…… 어쩌면 기다림.
기다려. 내가 먼저 이별을 말할 때까지 넌 아무것도 모른 채 거기 그대로 있어.
연극은 끝났다. 오로라는 죽었다. 커튼콜은 없다. 확인할 필요 없다. 오로라의 탄생과 죽음은 혼자만의 일이니까. 아무도 너에게 묻지 않을 것이다. 


읽은지 너무 오래돼서 기억이 잘 안난다... 이렇게까지 독후감을 미루면 안됐었는데 (˘̩̩̩ε˘̩ƪ)

최진영 작가를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주인공을 우울에 노출시킴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방법으로든 희망을 향해 걸어가게 한다는 점이기도 하고, 그 중 또 다른 이유는 이러한 과정 속에서 최진영 작가가 묘사하는 모든 상황과 감정들이 너무나 아름다운 문장으로 풀어진다는 점이다. 너는 방바닥에 누워 발코니를 바라본다. 잠든 너와 죽은 새의 눈높이는 비슷했을 것이다. 어딘가에서, 밤마다 새가 죽는다. 사람이 죽는다. 이별한다. 운다. 사랑한다고 말한다. 믿음 없는 사랑은 가능하다. 사랑 없는 믿음은 비참하다. 사랑이 제일이란 말을 수긍할 수밖에 없다. 너는 핸드폰을 꺼내 문장을 적어 너에게 보낸다. 처럼 흔하다고 별 꾸밈이 없고, 심지어 어려운 말도 아니고 감정을 과하게 발현시킨 것도 아닌 이 문장은 가슴에 크게 와닿는다. 짧고 가벼운 듯 쉽게 뱉어지는 것처럼 느껴지는 문장이 가슴 깊은 곳까지 박혀 이별과 사랑에 대해 깊게 생각하게 만든다. 읽혀지는 것처럼 이 문장들이 쉽게 쓰여지지 않았다는 뜻일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최진영 작가의 이런 문장들이 하나하나 다 너무나도 좋다.

사실 <오로라> 자체의 내용은 의문스럽기는 했다. 그냥 무작정 제주도로 떠난 여자가 자신의 원래의 인연을 내려놓음과 동시에 가짜 이름으로 살아가며 새로운 인연을 만들고 그렇게 살아가며 겪는 심리적인 변화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별로 새로울 것도 없는 흔한 스타일의 소재이기도 하고, 하지만 최진영 작가의 스타일로 풀어졌다는 점이 좋았다. 이야기에서 꽤나 중요한 포인트로 나오는 죽음과 시체에 대한 이야기에서는 나는 움찔하긴 했지만 이런 커다란 포인트 하나하나 모두가 중요한 이야기들이고 무가치하게 서술되는 시각적인 묘사부분들인 것은 아니기 때문에 고개를 끄덕이며 읽었다.

내가 최진영 작가를 좋아하게 된 계기는 <해가 지는 곳으로> 덕분이었는데, 지금까지 읽은 최진영 작가의 책들 중 <해가 지는 곳으로> 다음으로 좋은 책은 <오로라> 인 것 같다. "어떻게 이런 문장을 쓰지?" 라는 소리를 입 밖으로 꺼내게 만드는 ... 정말 신기한 힘을 가진 작가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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