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07. ~ 2024.04.08 (2)
서사의 위기
Die Krise der Narration
한병철 저
최지수 역
다산초당 출판
2023년 09월 15일 출간
국내도서 > 인문 > 인문학일반 > 인문교양
스토리 중독 사회는 어떻게 도래했는가!
이슈만 좇는 깊은 허무의 시대에 경종을 울리다
『피로사회』로 한국 사회를 뜨겁게 달궜던 재독 철학자 한병철이, 이번에는 빠르게 나타났다 사라지는 이슈만 좇느라 정작 자기의 생각으로부터 멀어져 버린 스토리 중독 사회를 고발한다. 『피로사회』 이후 10여 년 만에 새로운 화두를 던지는 이 책의 핵심 키워드는 ‘서사’와 ‘스토리’다. 나만의 생각과 맥락이 서사라면, 반짝하고 사라져 버리는 뉴스와 정보들은 스토리다. 한병철은 우리가 억압도, 저항도 없는 스마트한 지배체계에서 자기 삶을 SNS에 게시하며 정보화하도록 조종당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아름다운 꽃을 봐도 감동을 온전히 느끼며 내면으로 파고드는 것이 아니라 재빨리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어 인스타그램 스토리에 올리는 데 그치며 자신만의 서사를 만들지 못한다는 것이다. 고유한 이야기를 잃은 사회, 내 생각과 느낌을 말하지 못하고 입력한 정보를 앵무새처럼 내뱉는 사회의 끝은 서사 없는 ‘텅 빈 삶’이다.
“더 이상 멀리서 오는 지식이 아닌, 바로 다음에 일어날 일의 단서를 제공하는 정보만이 공감을 얻는다.” 신문 독자들의 관심은 코앞에 놓인 것 이상을 벗어나지 않는다. 그들의 관심은 호기심거리로축소된다. 근대의 신문 독자들은 시선을멀리 두고 머무르는 대신, 하나의 뉴스거리에서 다른 뉴스거리로 관심을 이동시킬 뿐이다.길고 느리게 머무르는 시선은 독자들에게 없다.
이야기는 그 안에 든 풍부한 경험과 지혜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조언을 준다. 반면 허구에 기반한 소설은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깊은 답답함’을 드러낸다. 이야기는 공동체를 형성하는 반면, 소설은 고독과 고립에 처한 개인이 낳은 산물이다. 심리분석이 포함된, 그리고 해석이 곁들여진 소설과 달리 이야기는 서술적이다. “특이한 것, 놀라운 것을 최대한의 정확성으로 서술하면서도 사건의 심리적 맥락을 독자들에게 주입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야기를 최종적으로 몰락시킨 것은 소설이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에 등장한 정보다. “이제 우리는 역사를 아무리 거슬러 올라가도 서사적 형식에 영향을 미친 적이 결코 없었던 메시지의 형식이, 언론이 시민계급에 대한 숙달된 지배를 가능케 하는 주요 도구가 된 고도 자본주의하에서 시민계급에 대한 완전한 지배수단으로 부상했음을 알게 되었다. 이제 그 일을 정보가 수행한다. 정보는 이야기와 다르면서도 소설보다 훨씬 위협적이라는 점이 드러났다. (…) 이 새로운 메시지의 형식이 바로 정보다.”
이야기를 할 때는 이완의 상태가 필요하다. 벤야민은 정신적 이완의 절정을 위해 지루함을 강화한다. 이 지루함은 ‘경험의 알을 부화시키는 꿈의 새’로 ‘꿈꿀 때 몸을 휘감는, 안쪽은 작열하듯 화려한 비단 안감이 둘러쳐진 따뜻한 회색의 천’이다. 그러나 신문이라는 종이의 숲에서 나는 바스락대는 정보 소음Informationslarm은 꿈의 새를 쫓아낸다. 이 숲에서는 ‘더 이상 이야기의 짜임이 일어나지 않는다.’ 오직 정보만이 자극의 형식으로 생산되고 소비된다.
귀 기울여 듣기의 능력은 갈수록 사라진다. 몰아의 상태로 경청하는 대신자기 자신을 생산하며,자기 자신에게 귀를 기울이기 때문이다.
소통은 점점 더 외부에 의해 유도된다. 자기 자신은 알아채지 못한 채 알고리즘으로 조종되는 자동적이고 기계적인 프로세스에 예속된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알고리즘으로 움직이는 블랙박스의 손에 내맡겨진다. 인간은 제어하고 착취할 수 있는 데이터 기록으로 축소된다.
찰리 코프먼Charlie Kaufman의 스톱모션 애니메이션 영화 「아노말리사Anomalisa」는 스마트한 지배 논리를 극명하게 드러낸다. 영화는 모든 사람이 똑같이 생기고 똑같은 목소리로 말하는 세상을 보여준다. 이 세상은 역설적이게도 진정성과 창의성이 요구되는, 신자유주의적인 동일성의 지옥으로 묘사된다. 영화의 주인공인 마이클 스톤Michael Stone은 성공적인 동기부여 트레이너다. 어느 날 그는 자신이 인형임을 인지하게 된다. 그러다 그의 얼굴에서 하관 조각이 떨어져 나가고 그는 그것을 손에 받아 든다. 그는 경악한다. 떨어져 나온 그의 입이 스스로 지껄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경험은 한 세대에서 다른 세대로전승된다는 특징이 있다. 벤야민은 근대에 만연한 경험의 상실을 비탄했다. “다 어디로 사라졌는가? 무언가를 제대로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는 이가 아직 존재하는가? 떠나는 이들로부터 남겨진, 세대에서 세대로 대물림되는 반지와 같이 견고한 말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 오늘날 격언은 누구에게 도움이 되는가?”[ 14 ] 사회에서는 입에서 귀로 흘러 들어가는 전승 가능한 경험이 계속해서 결핍되어 간다. 이젠 더 이상 전승되지 않고 이야기되지 않는다.
조언은 이야기의 맥락이 되는 그 사람의 일상에서 탐색되고 얻어진다. 조언은지혜로서 ‘삶의 구조에 녹아들어’ 있다. 그리고 이러한지혜는이야기로서의 삶에 내포되어 있다. 따라서 삶이 더 이상 이야기될 수 없게 되면 그 안의 지혜도 소멸된다. 그리고 지혜가 사라진 자리는문제해결의 기술이 대체한다. 지혜는이야기되는 진리다. ‘이야기하기 예술은 끝을 향해 가고 있다. 진리의 서사적 측면인 지혜가 사멸하고 있기 때문이다.’
경험은 전승과 연속성을 전제한다. 경험은 삶을 이야기될 수 있도록 만들고 안정화한다. 경험이 사라진 곳, 즉 구속적이거나 지속적인 것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그런 곳에는벌거벗은 삶, 즉생존의 삶Uberleben밖에 남지 않는다.
경험은 전승과 연속성을 전제한다. 경험은 삶을 이야기될 수 있도록 만들고 안정화한다. 경험이 사라진 곳, 즉 구속적이거나 지속적인 것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그런 곳에는벌거벗은 삶, 즉생존의 삶Uberleben밖에 남지 않는다.
행복은 하나의 시점에 국한되는 사건이 아니다. 행복은 과거까지 닿아 있는긴 꼬리를 갖는다. 그것은 살면서 거쳐온 모든 것을 먹고 자란다. 잠시 반짝거린 빛이 아닌후광이 그것의 현상을 나타내는 형식이다. 우리는과거의 구제를 수행해야 한다. 과거를 현재에 끌어내어 엮고 현재 안으로 계속해서 작용하게 하는, 즉소생하게 만드는서사적 장력이 필요하다. 그렇게 행복은 구원과 공명한다. 모든 것이 우리를 최신성의 광란으로 몰아넣는 곳, 우연성의 폭풍우 한가운데에 서 있는 사람에게 행복은 있을 수 없다.
근대의 삶의 파편화와 위축은 현존재가 자기의 실존 안으로 출생, 사망, 그리고 ‘그 사이의 모든 시간’을 운명으로 ‘포함’시키는 과정인 ‘전체 실존의 신장성’[ 31 ]으로 대응된다.[ 32 ] 인간은 한 순간에서 다음 순간으로 이동하며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다. 즉 순간에 예속된 존재가 아니다. 인간의 실존은 출생과 사망 사이의 전체 시간에 걸쳐 있다. 외부지향성이 부족하고 존재에 서사적 닻을 내리지 못하므로, 모든 사건과 사태를 관통하고 감싸는 생동성 있는 단위로서 태어남과 죽음 사이의 시간적 폭을수축시킬 수 있는 근력이 자기das Selbst로부터 나와야 한다. 존재의 지속성은 자기의 지속성에 의해 보장된다. 이 자기의 지속성은 시간의 파편화로부터 우리를 보호하는 중심 시간 축을 형성한다.
『존재와 시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불안은 세계에서 멈춰 설 곳을 찾지 못하는 근대인의 병리에 속한다. 죽음조차도 더 이상 의미 있는 구원 서사에 포함되지 않는다. 그 죽음은나의 죽음, 내가 홀로 감당해야 할 죽음이다. 나의 죽음이 자기를 단번에 끝장내 버리기 때문에 현존재는 죽음에 직면했을 때자기 자신으로 수축한다. 그리고 죽음의 지속적 현재성로부터자기의 역설이 눈을 뜬다. 자기를 위해 결정한 현존재의 실존적 경직은 장력, 즉 위협적인 시간적 위축증으로부터 현존재를 보호하고 현존재에 시간적 지속성을 갖도록 도와주는 근력을 발달시킨다.
‘운명 갖기Schicksal-Haben’는 자기 자신을 그 자체로 받아들이는 것을 뜻한다. 스스로를 ‘순간적 실제’에 내맡기는 사람에겐 이러한 운명이 없고 ‘고유한 역사성’이 없다.
디지털화는 시간적 위축증을 악화시킨다. 실제성은 좁은 현실 폭을 가진 정보로 부서진다. 정보는 놀라움의 자극으로 생명을 유지한다. 정보는 시간을 파편화한다. 주의도 파편화한다. 정보는머무름을 허용하지 않는다. 가속화된 정보 교류 속에서 정보는 또 다른 정보를 사냥한다.
트위터,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틱톡, 스냅챗 같은 디지털 플랫폼은 이야기의 영점零点에 위치해 있다. 이들은 이야기 매체가 아닌 정보 매체다. 서사적으로가 아닌 첨가적으로 작동한다. 여기서 파악되는 정보들은 하나의 이야기로 응축되지 않는다. “인생의 이벤트를 페이스북 프로필에 어떻게 만들거나 편집하나요?”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할 것이다. “정보를 클릭하고, 좌측의중요 이벤트를 클릭하세요.” 삶의 사건들은 단순한 정보로만 취급된다. 그것들로부터 어떠한 긴 이야기도 직조되지 않는다. 이들은 서사적 맥락 없이 그저접속사로 연결된 채 나열된다. 사건의서사적 합合이 일어나지 않는다. 디지털 플랫폼에서 ‘성찰적 서사’와 살아온 이야기의 응축은 전혀 가능하지 않으며 요구되지도 않는다. 디지털 플랫폼의 기술적 장치마저도 시간 집약적이고 서사적인 실천Praxis은 허용하지 않는다.
인간의 기억은 선택적이다. 그게 바로 데이터 기록과의 차이다. 디지털 저장소가 첨가적이고 누적적으로 작동하는 반면, 인간의 기억은 서사적으로 작동한다. 이야기는 사건의 선택과 연결에 기반한다. 즉, 선택적으로 진행된다. 이 서사의 길은 좁다. 선택된 사건만이 이야기에 동원된다. 이야기된, 또는 기억된 삶은 필연적으로 그 사이사이에틈이 존재한다.
기억은 체험한 것의 기계적 반복이 아닌, 언제나 새로 이야기되어야 하는 서사다. 기억에는 필연적으로 틈이 존재한다. 기억은가까운 것과먼 것을 전제한다. 경험한 모든 것이간격 없이 현재로 존재한다면, 즉가용한 상태라면 기억은 사라지는 것이다. 체험한 것의 빠짐없는 재현은 이야기가 아니라보고서나프로토콜에 불과하다. 이야기하거나 기억하려는 사람은 많은 것을잊어버리거나 생략할 수 있어야 한다. 투명사회는 이야기와 기억의 종말을 의미한다. 어떤 이야기도 투명하지 않다.투명한 것은 정보와 데이터뿐이다.
데이터 기반 심리학 또는 사회학은 인간의 행동을 정확히 예측하고 제어할 수 있도록 해준다. 이론은 직접적인 데이터 비교로 대체된다. “언어학에서 사회학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행위에 관한 모든 이론은 옛것이 되었다. 분류체계, 온톨로지, 심리학마저 전부 잊어라. 인간이 왜 그런 행위를 하는지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는가? 그냥 하는 것뿐이고, 이제 우리는 그것을 전례 없는 정확도로 추적해 측정할 수 있다. 데이터만 충분히 확보되어 있다면, 숫자가 알아서 말해줄 것이다.
실제로는 자기 묘사에 다름이 없는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의 ‘스토리’도 사람들을 끊임없이 고립시키고 있다. 이야기와 달리 스토리는 친밀감도, 공감도 불러내지 못한다. 이들은 결국 시각적으로 장식된 정보, 짧게 인식된 뒤에 다시 사라져 버리는 정보다. 이들은 이야기하지 않고광고한다. 주목을 두고 벌이는 경쟁은 공동체를 형성하지 못한다. 스토리셀링으로서의 스토리텔링 시대에 이야기와 광고는 구분하기가 불가능하다. 이것이 바로 지금의 서사의 위기다.
서사는 감정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에 날것의 사실 또는 숫자보다 효과가 좋다. 감정은 무엇보다 서사에 반응한다.스토리를 판다는 것은 결국감정을 판다는 말과 같다. 감정은 자신도 인지하지 못하는 신체의 본능 층위에서 행동을 제어하는 대뇌변연계에 그 시스템을 두고 있다. 감정은이성을 거치지 않고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 그럼으로써 인지적 방어 반응조차 피해가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이야기를 의도적으로 자신의 것으로 전유함으로써 전前 반성적 층위의 삶을 점령해 버린다. 그럼으로써 의식적 통제와 비판적 성찰을 피해간다.
이제 정치인들도 이야기가 팔린다는 걸 알고 있다. 주의를 끌기 위한 싸움에서 서사가 주장보다 효과적이라는 것이 입증되었다. 그렇게 서사는 정치적으로 도구화된다. 지성이 아닌 감성에 호소한다. 스토리텔링은 정치적 소통의 효과적인 기술로서, 미래까지 영향을 미치고 사람들에게 의미와 방향성을 보여주는 예의정치적 비전이 결코 아니다. 정치적 이야기는 사물의 새로운 질서를 약속하고가능한 세계의 모습을 상세히 묘사한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희망을 만드는 미래 서사가 부족하다. 우리는 줄타기를 하며 하나의 위기에서 다음 위기로 넘어간다. 정치의 역할은 문제 해결사로 축소된다. 이야기만이 미래를 연다.
삶은 이야기다. 서사적 동물animal narrans인 인간은 새로운 삶의 형식들을 서사적으로 실현시킨다는 점에서 동물과 구별된다. 이야기에는새 시작의 힘이 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모든 행위는 이야기를 전제한다. 이와 반대로 스토리텔링은 오로지 한 가지 삶의 형식, 즉 소비주의적 삶의 형식만을 전제한다. 스토리셀링으로서의 스토리텔링은 다른 삶의 형식을 그려낼 수 없다. 스토리텔링의 세상에서는 모든 것이 소비로 환원되기 때문이다. 우리로 하여금 다른 이야기, 다른 삶의 형식, 다른 지각과 현실에는 눈멀게 한다. 바로 여기에 스토리 중독 시대 서사의 위기가 있다.
우리는 이야기의 시대에 살고 있다. 아니, 우리는 정보의 시대에 살고 있다.
나는 원래 철학서를 잘 읽지 않는 편인데, 200페이지 이하의 얇은 교양서를 읽기 위해 책을 찾다가 이 책을 고르게 됐다. <서사의 위기>라니... 정말 흥미로웠다. 제목만으로도 흥미로운데, 간단하게 소개된 책소개가 내 눈길을 끌었다. 빠르게 나타났다 사라지는 이슈만 좇느라 정작 자기의 생각으로부터 멀어져 버린 스토리 중독 사회를 고발한다. 라니.
나는 2018년부터 웹툰을 많이 봤다. 일반 웹툰이 아니라 로맨스판타지의 회귀빙의환생을 소재로 한 웹툰들이다. 2018년부터 붐이 일기 시작해서 지금까지도 많은 작품들이 출판되고 있다. 웹을 통해 우선 웹소설로 제작되면, 그 중 일부가 정식 작가 혹은 데뷔 작가와 계약하여 웹툰화 된다. 이런 작업을 하는 로판 전문 웹툰/웹소설 회사가 코로나 시즌 사이로 아주 많이 늘어났다. 이런 회사들은 대부분 신생업체거나 출판사를 본사로 두고 뻗어나온 형태이다. 코로나 시대에는 사람들이 컨텐츠를 쉽게 구매하고 거래했는데, 그러다보니 스토리가 빠르게 진행되고 일명 '사이다' 구간이 빠르게 찾아오는 회빙환 작품들이 인기를 끌었다. 캐릭터들이 천천히 인간관계를 쌓고 그 관계에 의해 서사가 쌓이고 이야기가 흘러가서 결국은 배신당하거나 그 배신에 대해 복수하며 사이다를 일으키는 기승전결의 기존 이야기들과는 다르게, 회빙환 작품들은 이미 존재하는 어떤 소설에 '빙의'하거나 혹은 '회귀'하여 이미 인간관계를 꿰뚫고있거나, '환생'하여 배경이 되는 시대보다 훨씬 고능한 지식을가지고 있는 상태로 시작한다. 이러다보니 기승전결이 아니라, 애초에 모든 이야기가 '결'로 시작한다. 이러다보니 초반에 나오는 복수 서사가 끝나면 이야기는 허무맹랑해지고 기가 빠진다. 2030세대가 남자여자 가릴 것 없이 회빙환 작품들을 많이 보다보니, 그런 작품들이 돈이 되고, 그에 의해 이런 작품들이 공장식으로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로맨스 판타지, 판타지, 무협, 현대물 등등... 모든 작품들이 서사가 없이 강한 자극이 오는 스토리에만 초점을 맞추고 쓰여진다.
이런 상황에 대해 진짜진짜 많은 말을 오랫동안 해왔고, 웹소설/웹툰을 많이 본 사람들이라면 모두 동일하게 생각할 것이다. 깊은 생각을 하지 않더라도 '왜 이렇게 다 내용이 똑같을까? 표절이라는 말을 내던질 수 없을 정도로 웹툰/웹소설 시장의 전반적인 모든 소설들이 동일한 구조와 소재를 가지고 있다'라는 생각을 해보았을 것이다.
나는 이 <서사의 위기>를 읽으면서 언급된 SNS들이 아니라, (물론 그런 것들도 스토리 중독의 가장 큰 원인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동시에 스토리 중독에 대한 산물이라고도 할 수 있다) 웹툰/웹소설 시장을 떠올리며 크게 동의했다. 나는 읽으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는데... [나도 사이다 원샷 글들을 좋아하고, 후회 복수믈을 좋아하긴 하지만 요즘 회빙환 작품들을 보면 질리는 부분들이 많다. 우리는 단순히 정보값이 되어버린 포인트만을 즐기려고 하고, 그러다보니 모든 작품들이 동일성의 반복이 되어버린다. 이런 현상이 계속되다보니, 모든 작품들이 지루하게 느껴지고, 지겹고, 끊임없이 싸구려 음식을 억지로 먹어야하는 기분에 사로잡힌다.], [인간의 삶은 순간순간을 이동하며 사는 파편의 연속이 아님에도, 어떤 사이다/복수의 상황을 위해 강제적으로 부여되는 인물의 파편이 오직 그 주인공의 삶을 대변한다. 인물들은 파편이 아닌 하나의 존재로서 사랑받아야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 좋은 작품이 될 수 있을텐데도 말이다. 요즘 웹소설들에 나오는 인물들은 고작 파편의 연속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라고.
사람들은 강한 한방에 중독되어있다. 복권에 당첨되는 것이나 집값이 오르는 것과는 이야기가 다르다. 코로나 시대를 거치면서 많은 것들이 급격하게 변하고 가파르게 치솟거나 추락하게 되었다. 삶이 유하게 흐르지 않고 빠르게 휘몰아치는 것이다. 인간은 100년 가까이 산다. 사람들이 삶을 하루, 이틀 보내며 흘러가는 세월에 맞추어 천천히 살아가야 할텐데, 하루, 하루 날이 지날 때마다 일 분, 일 초가 지날 때마다 심장을 조이며 주식 그래프가 오르고, 비트코인 그래프가 떨어지는 것에 폭발하거나 10초짜리 영상을 보고 분노하고, 3시간자리 영화를 10분으로 줄여놓은 영상을 보고 작품을 이해하려고 한다. 이런 것도 한병철 철학가가 말하는 스토리 중독이라고 생각한다.<서사의 위기>를 읽으면서... 전자책으로 보다보니 약 90페이지 정도로 아주 짧게 읽었지만 한 단어, 한 문장을 꼬박꼬박 이해하며 넘어가느라 오래 걸렸다. 그럼에도 문장이 어렵지 않고, 그렇다고 가볍지도 않았다. 단순히 현대 사회의 단순성에 대해서만 말하는게 아니라, 어쩌면 내가 살아가는 방법이 그저 하나의 파편으로서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어 많이 배우는 기분이었다.
철학이란게 항상 막연하고 어려운, 그리고 허황만 좇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 얇은 책 한권으로 꽤나 많은 것들을 배우고 느끼니 지금까지 내가 우매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신기했다. 가능하다면 이런 책들을 앞으로 조금씩 양을 늘려 읽어나가야지. 정말 좋은 책이었다. 귀국하면 한 권 사서 책장에 꽂아놔야지~ 하는 생각을 할 정도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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