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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2.30. ~ 2024.12.30. (1)
뿌리 없는 별들
은림, 박성환 저
알마 출판
2020년 04월 30일 출간
낮은 곳으로 임하소서
이서영 저
알마 출판
2020년 05월 30일 출간
별들의 노래
김성일 저
알마 출판
2020년 04월 30일 출간
역병의 바다
김보영 저
알마 출판
2020년 05월 30일 출간
외계 신장
이수현 저
알마 출판
2020년 05월 30일 출간
친구의 부름
최재훈 저
알마 출판
2020년 05월 30일 출간
악의와 공포의 용은 익히 아는 자여라
홍지운 저
알마 출판
2020년 04월 30일 출간
우모리 하늘 신발
송경아 저
알마 출판
2020년 04월 30일 출간
한국소설 > 과학소설(SF) > 한국 과학소설
Project LC.RC
공포문학의 전설, 러브크래프트를 오마주하고 전복하며
2020년 오늘날 우리가 마주친 공포와 경이를 그려내다
한국의 대표적인 SF 작가들이 공포문학의 거장 러브크래프트를 재창조하는 프로젝트. 인간의 깊은 상상력을 자극하는 새로운 공포와 현실과 환상의 구분이 모호한 세계관, 기괴하고 음산한 이미지들로 이루어진 러브크래프트의 작품을 오마주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인종차별적이며 남성 중심적이기도 한 그의 낡은 관념은 전복적 시각으로 다시 썼다. 러브크래프트에 대한 오마주로 시작한 작품들은 오늘날 현실 속에서 우리가 마주한 공포의 실체가 무엇인지 날카롭게 묻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달리던 시외버스는 산어귀 정류장에서 잠시 멈췄다. 아컴이었다.
시원한 맥주가 간절했지만 이런 곳에서 술을 마시면 어떤 취급을 당할지 뻔했다. 대충 배고픔이 가시자 하룻밤 묵을 것이 걱정되었다. 여기는 전혀 안전해 보이지 않았다. 자물쇠가 있다 해도 여관 주인이 열고 들어올 수 있다면 아무 소용 없었다. 남자들에겐 일어나지 않는, 상상도 못 할 사고들이 여자들에겐 너무 쉽게 일어났다.
“저기 별이 떨어졌다우.”
노인은 거실에 난 좁은 덧창 너머로 마의 황무지를 가리켰다.
아이는 혼자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닌데 임신으로 몸을 빼앗기고, 출산으로 목숨을 위협받고, 육아로 삶을 빼앗기는 고통은 오직 그 혼자만의 것이었다.
이것은 결코 객관적인 기록이 아닐 것이나, 그렇다고 사실이나 진실이 아니라고도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한밤의 꿈, 혹은 밝은 대낮의 백일몽들은 모두,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기억과 기록으로 해명되지 않는, 해명할 수 없는 진실의 일말을 함축하고 있다. 오히려, 어쩌면, 이성의 궁극적인 기능은 우리의 자아가 낮 시간 동안, 밤에 목격한 세계와 우주의 진실로부터 안전해지도록 우리가 목도한 이야기와 이미지를 편집하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그렇게 재단된 이야기를 진실이라고 받아들이며, 세계의 실재에서 애써 눈 돌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것이 모두 다만, 어리석은 여자들의 어리석은 몽상과 환상, 백일몽일 뿐일까?
그렇다면, 그렇더라도, 나는 진실인 꿈을 선택하겠다.
어느 사이엔가 나는 별들의 바다나리의 조각들 속을 걷고 있었다. 내 옆에는 후아나와 조에, 베르타, 테레사, 카를로타, 에바, 페피타, 돌로레스까지, 우리 탐험대 전체가, 십 센티미터 이하의 조그만 축도로 축소되어서 별들의 바다나리의 작은 조각 숲을 거닐며, 그녀의 동심원을 따라 지구의 잊힌 역사를 더듬으며, 산책하고 있었다. 남자들은 결코 알지 못하는 그들의 어머니들의 어머니들의 어머니들의 역사를.
나는 미스카토니크 탐사대가 우리가 남겨놓고 온 그녀의 다른 자매들을 만나기를 바란다. 만나는 것을 상상한다. 그녀의 다른 자매들은 또 우리 인류에게 어떤 지혜를 나눠줄 수 있을까? 우리가 미처 다 듣지 못했던, 우주의 신비로운, 잊힌, 별들 사이의 노래를….
공사라는 일의 가장 큰 매력은 근본적인 문제를 뜯어고친다는 점이다. 어릴 때 생리통으로 고생을 할 때면 슬은 책상에 엎드려서 가만히 상상을 했다. 자궁을 뜯어내서 반으로 가르고 햇볕에 뽀송하게 말리는, 혹시 열어서 안에 무슨 혹이라도 있다면 정성껏 하나씩 터뜨리고 잘라내고 약을 바르는, 햇볕에 산뜻하게 마른 자궁을 다시 잘 꿰매서 몸 안에 집어넣는 상상을 하고 나면 어쩐지 배가 덜 아픈 느낌도 들었다. 물론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뚫지 마! 그거 뚫으면 안 돼! 주술이 풀려, 빈오재의! 빈오재의 주술이 풀려버린다고!”
‘나는 시큼하고 찝찌름한 계집들의 내음 속에 사는 위대한 고대의 암컷. 그들은 나를 그것이라 불렀고, 빈오재라 불렀고, 재앙이라 불렀고, 크툴루라 불렀다. 계집들이 흘린 고통의 물속에 절망의 도시를 만들었다. 이제 내가 여기 돌아왔으니 원귀들의 목소리는 세상을 광포한 절망으로 빠뜨릴 것이다. 독이 뚝뚝 흐르는 촉수로 모든 것을 감싸 올려 세상에 적합한 형벌을 내리리라. 그대의 정신은 함께할지니 깜깜한 암흑 속, 깊이를 알 수 없는 아늑한 절망에 나와 함께 있으리라. 이제 우리의 세계를 되찾을 것이다.’
러브크래프트의 소설 속에서 여자들은 ‘멍청하게도’ 자꾸 그레이트 올드 원을 인간의 세계로 끌고 옵니다. 그에 반해 한반도의 수많은 공포 서사에서 여자들은 ‘한이 맺혀서’ 인간의 세계를 파멸시키려 합니다.
혐오의 뒤편을 들여다보니 형태 자체는 비슷한 이야기가 되었는지도 모르겠어요. 먼저 읽어본 친구들이 공포 소설보다는 신나는 모험 소설처럼 읽어줘서 기뻤습니다. 빈오재는 많이들 짐작하겠지만 애너그램입니다. 뻔한 애너그램이지만 맞춰주시면 작가로서 기쁠 거예요.
그러나 그것은 박애 정신 내지 넓은 오지랖이었다. 강 선생이 일요일 아침에 하필 자기를 콕 찍어서 교회에 꼬지를 나가자고 한 것은 의외였다. 영준이 물어볼까 말까 하는 차에 강 선생이 다시 말을 걸었다.
목사의 얼굴에는 아까의 온화한 눈과 인자한 미소가 더 이상 없었다. 눈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뭐라 말하기 어려운 색깔들이 소용돌이치고 있다. 시커먼 구덩이 같은 입안에서는 별들이 빛나고 있다. 저것은 보아서는 안 될 것이라고, 영준의 뇌 깊은 곳의 무언가가 비명을 질렀다.
추위가 사라지고 사방이 따뜻해졌다. 색깔 아닌 색깔의 별들로 가득 찬 밝은 어둠 속에서 영준은 겁에 질려 움직이지 못하는 전동섭을 보았다. 아름다운 불협화음이 흐르는 이 어둠 속에서는 전동섭의 공포 어린 신음이 오히려 조화롭지 못하게 들렸다. 손에서 떨어뜨린 타이어 렌치가 풀 바닥에 부딪히는 둔한 소리조차도 유리가 깨지는 것 같은 소음으로 느껴졌다.
별들이 천천히 다가와 전동섭을 그리고 영준을 감쌌다.
이마가 따뜻해졌다. 영준은 박 씨가 형제자매와 함께 살 수 있는 사람인지 궁금해하며, 박 씨의 머리를 향해 입을 벌렸다.
나는 해안 저쪽에 치솟아 있는 저주스러운 섬을 뚫어지게 보았다. 그날, 삼 년 전 생겨난 섬.
지진이 난 그날 밤, 해저 수 킬로미터 아래에 있던 마그마가 바다 밑 지표를 뚫고 분출했다. 화산은 해원항 연안에 새 섬을 만들었고, 해원항에서 대진항, 천곡항에 이르는 동해시 연안 일대를 평균 수 센티미터 들어 올렸다. 해일이 연안을 덮었고 해원마을 가구 반이 물에 잠겼다.
재난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솟구친 바위산과 얕아진 수면이 해류의 흐름을 바꾸었고, 해원항 일대는 고인 호수나 다름없어졌다. 연안은 순식간에 플랑크톤이 창궐하여 찐득찐득하고 걸쭉한 늪처럼 변했다. 걸쭉해진 바다에서 물고기들이 질식해 떼죽음을 당했고 그 죽은 몸뚱이가 부패하면서 마을에는 썩은 내가 진동하게 되었다. 뱃길은 막혔고 양식장과 수산업장이 몇 달 새에 모두 문을 닫았다. 재난은 그것으로도 끝나지 않았다….
악취가 진동했던 몇 달 새에 마을에 무시무시한 감염병이 창궐했다. 피부병과 골격 기형에 생선 비린내 같은 악취증을 동반하는 병이었다. 피부에 반점과 두드러기가 생기다가 어느 시점에서는 나무처럼 딱딱해진다. 땀구멍이 닫히며 머리카락이 빠지고, 안압이 높아져 눈이 돌출된다. 땅에 묻혀 있던 지층이 드러나면서, 현대인에게 알려지지 않은 고대의 세균이 부패한 바다에서 창궐한 기생충과 결합해 생겨난 병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었다.
감염 경로는 장기간 접촉으로 짐작되지만 명확하지 않다. 가족 간에도 전염이 안 되는 사례가 많아 사람에 따라 항체가 있는 경우가 있다고 짐작할 뿐이다. 하지만 비감염자의 몸에서 항체를 분리하는 시도는 삼 년째 계속 실패하고 있다.
백신만 개발되면 격리를 풀어준다는 약속이 있었지만, 감염이 동해시 바깥으로는 퍼지지 않았고, 골격 기형까지 오는 중증은 이 마을에서만 발생하는 것이 명확해지면서 격리만 강화하는 방향으로 바뀌었다. 언론은 매일이다시피 우리가 어떤 종류의 비인도적인 잘못을 해서 이리되었으리라는 종류의 기사를 쏟아내고 있다.
“강원도 전체에 종합병원은 열다섯뿐인 건 아시어요? 그라고 동해병자 받아주는 데는 사랑병원뿐인데 거긴 응급 시설이 없어요. 우리 마을에서 아픈 사람 나오면 그냥 죽는 거드래요.”
나는 굳은살 한 점 없는 새하얀 남자의 손을 보며 다시 한번 짙은 이질감을 느꼈다. 나라가 돌봐주고 보호해주는 세계에서 온 사람. 이 사람을 따듯하게 감싸 안아 보호해주고 있을 안온하고 평이한 일상을 상상하니, 질투심에 몸서리가 쳐질 지경이었다.
기울어진 햇빛이 애들의 벗은 몸뚱이 위로 흘러내렸다. 애들은 종종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노래를 한다. 얼마 전에야 그게 구강 구조가 망가진 동해병자의 발음을 흉내 내는 것임을 알았다.
어느 무속인네 집 딸내미가 어깨너머로 배운 의식을 친구들 사이에 전파한 듯했다. 죽은 사람들을 위로하고, 죽은 물고기들을 위로하고, 노한 바다의 왕을 달래고, 더해서 그날 바다에서 올라온 종족을 위로하는 의식이라고 했다.
바다에서 올라온 종족이 뭐냐고 물었더니, 그날 재난 현장에 사람의 이빨이 있고 팔다리가 있는 기이한 생물들이 마을 곳곳에 널브러져 있었다고 한다. 어른들이 안 그래도 흉흉한데 나쁜 소문이 더 돌까 봐 외부인이 발견하기 전에 서둘러 감춰 숨겼노라고.
실은 바다에는 모래 바닥을 기어다니다 다리 비슷한 기관을 발달시킨 물고기도 있다. 화산 폭발로 먼바다에 살던 희귀한 물고기들까지 연안으로 휘말려 왔고, 재난의 충격에 정신을 놓은 사람들이 보면서 이런저런 상상을 했으려니 한다.
나는 별생각 없이 폰을 만지다가 그대로 굳어버렸다. 만신이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나를 정면으로 보는 형형한 두 눈이 말로만 듣던 호랑이의 눈 같았다. 아니, 호랑이가 아니다. 이글거리는 금빛 불덩이 속에 가늘게 세로로 찢어진 검은 동공. 뱀의 눈이다. 꼼짝도 못 하게 나를 멈춰 세운 뱀의 두 눈이 점점 커지고, 커지고, 커져서 하늘과 땅을 모두 뒤덮고….
그러나 잠깐만. 헉, 하고 어리둥절해졌다. 노만신은 분명히 나에게 등을 돌리고 있었다. 한 번도 움직이지 않은 것처럼 독경을 계속하고 있었다. 주위에 선 신딸들도 마찬가지였다.
순간 공포가 몰려왔다. 악몽 속에서처럼 논리도 이유도 없이 엄습하는 공포였다. 나는 겁에 질려서 뒷걸음질을 치다가 그 집에서 도망쳐 나왔다. 누가 물어본 것도 아닌데 괜히 변명처럼 마스크 속으로 “화장실”이라고 말해가면서.
현관으로 도망쳐 나가서 마스크를 뜯어내듯 벗자 다시 불쾌한 냄새가 맹렬하게 엄습했다. 왜 이 냄새는 시간이 지나도 약해지지 않는 건지. 나는 차가 서 있는 곳까지 달려가서 문을 벌컥 열고 먹던 생수병을 꺼냈다. 입에 넣기만 하고 제대로 씹지도 못했던 카페인 껌을 해독제처럼 열심히 씹어대며 생수병을 들어 얼굴에 물을 끼얹자 조금 정신이 돌아왔다.
나는 얼굴을 벅벅 문질렀다.
내가 졸았던 걸까? 언제부터, 언제까지?
가슴에 손을 올려보니 유난히 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었다.
‘계속 잠을 제대로 못 자서 그래. 그놈의 쥐 때문에.’
혹시나 하고 들여다봤지만 녹음 버튼을 누르지 않았는지, 녹음된 건 없었다. 친구들 단톡방을 보았다. 오늘 유행하는 유머가 몇 개 올라와 있었다. 나는 대학원 단톡방 쪽을 열고 한마디 적었다.
‘나 황 따라 외딴집에 굿 보러 왔는데 지금 환각 본 듯.’
그러자 바로 몇 명이 반응했다. 주로 웃음이나 놀란 표정의 이모티콘. 그리고 기찬 선배의 말. ‘야, 그거 진짜면 땡잡았네, 김민서. 베스트셀러 쓸 수 있겠다. 환각 버섯도 있음?’
썩 기분이 좋진 않았지만 웃음이 나오기는 했다.
“미치는 게 무섭소?”
“네? 네, 네, 무섭죠. 너무 무서워요.”
그러자 경자 만신은 다시 물었다.
“왜?”
나는 조금 멍해졌다. 세상에 그 누구도 죽는 게 무섭냐고 묻지는 않을 것이다. 누구나 죽음을 두려워하고, 그것은 당위였다. 보통은 미치는 게 무섭다는 마음도 비슷하게 생각하지 않을까.
“어떤 일은 그냥 일어나지요.”
“네… 네?”
“공부하는 사람들은 논리적으로, 뭔가 아귀가 딱딱 맞게 설명하고 싶어 하는 경향이 유난하던데, 민서 씨도 그렇지 않나? 이래서 저렇게 됐고, 그래서 그렇게 됐고. 다들 그렇게 딱딱 떨어진다 생각하고 싶어 하지만 그렇지가 않아. 그렇게 생각하려다간 더 힘들어져. 일은 그냥 일어나요. 좋은 일도, 나쁜 일도.”
그는 우주의 냉정한 진실을 그렇게 투박한 몇 마디로 요약했다.
물론 이 세상에는 사실 권선징악은커녕 인과 관계도 없다. 우주는 이치에 닿지 않고, 세상은 인간에게 무관심하며, 모든 일은 인과와 상관없이 일어난다. 어디에도 의미 같은 것은 없다. 우리는 하찮은 존재다. 그게 너무 가혹해서 우리 모두가 가장 구석진 곳에 애써 뚜껑을 눌러 닫아 처박아두고 외면하는 현실이다.
“누구 탓이 아니라는 건, 아무 상관도 없다는 말이 아니야. 인간이라는 게 어찌 앞도 뒤도 없이 홀로 존재하겠나. 또 어찌 인간만이겠는가. 만물이 다 서로 얽혀 있고, 서로서로 영향을 미치지. 다만 신을 받아들인다는 건 그런 걸 아는 거라네. 나보다 훨씬 큰 게 있다는 걸 알고, 내가 우주의 티끌이라는 걸 아는 것. 서로 영향을 미친다고 해봤자, 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 그걸 알면 자유로워지지.”
나는 그 아리송한 말에 어리둥절해졌다. 이건 또, 불교 철학인가.
“그리고 자유로워지면 비로소… 혼돈을 볼 수가 있지.”
“여기는 네가 있을 곳이 아니다.”
“그건 너도 마찬가지일 텐데.”
“꺼져라, 기어 다니는 혼돈이여.”
그 와중에도 머리에 쑤셔 박아 놓은 지식은 자동으로 풀려나왔다. 만신이란 그 몸에 모든 신을 다 내릴 수 있는 존재였다. 모든 무당의 시조가 그랬다고 한다.
“나는 유난히, 특별한 신까지, 내려받을 수 있지만. 대가가 없지는 않다오.”
경자의 얼굴이 내 눈앞에서 삽시간에 주름지고 늙어가며 속삭였다.
“무서워 말아요.”
마지막에 들었다고 기억하는 말은 그것이었다.
나쁜 일이 그냥 일어난다면, 좋은 일도 그냥 일어난다.
그것이 왜 하필 나에게 눈을 돌렸는지 이해할 수 없다면, 경자 만신이 나를 구하러 나타난 것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누덕누덕한 기억을 짜깁어보면 경자 만신의 신령님도 딱히 선한 신이었다는 생각은 들지 않고, 나를 구하려 했다기보다는 뭔지 모를 그 어두운 것을 쫓는 데 더 관심이 있었던 것 같다. 이해하기는커녕 이해할 엄두조차 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둘 다 마찬가지였다. 그렇다 해도 그 싸움이 나를 구했다는 사실은 기적처럼 다가온다.
그리고 분명히 경자 만신은 나를 구하러 왔다. 희생을 무릅쓰고서.
그 생각을 할 때마다 울고 싶어진다. 그리고 경이롭다. 왜 그랬을까. 안 지 며칠밖에 안 된 어린 여자를 위해 왜 그렇게까지 해준 걸까. 나에게 그럴 가치가 있을까.
내 상담가는 경자 만신이라는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애초에 그건 어머니와 할머니를 투영하고 내 죄책감을 덧입힌 환상이라고 설명했다. 상관없다. 나는 만신이 나를 구해준 것만은 어떤 층위에서건 진실이었다고 믿는다.
나는 쉽게 뭔가를 믿는 사람이 아니었다. 원래도 의심이 많은 데다 끊임없이 뒤집어 생각하도록 훈련도 받았다. 냉철하고 객관적인 시각을 갖췄다고, 받아들이기 싫은 것도 받아들일 수 있다고 제법 자부하고 있었다. 논리적으로, 정연하게, 세계를 이전과 같은 질서에 편입시키기 위해,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구역질이 나도록 생각했다. 상담가의 말이 맞을 거라고, 경자 만신이라는 인물은 애초에 너무나 내 이상의 구현이었으니까, 내 마음이 만들어낸 존재가 맞을 거라고, 내가 연약한 정신을 지키기 위해 만든 존재일 거라고.
그런데 만약 그렇다면, 그거야말로 나를 지켜야 할 공포는 실재했다는 뜻이 아닌가.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지만 늘 내 등 뒤에 있는 두려움은.
그러니 나는 우주 어딘가에 그녀가 있을 것을 믿는다. 믿기로 한다. 내가 우주의 비밀을 엿볼 수 있게 되면, 찾을 수 있으리라 믿는다. 그건 어쩌면 아직 이 우주에도 아름다운 이치가 존재할지 모른다는 희망이기도 하다. 내 몸에 딱 맞게 만들어진 감옥에도 빛이 드는 쥐구멍이 뚫려 있을지 모른다는 희망.
그러니 사실은 이미 어디에도 없다는 걸 알게 된다 해도, 상관없다. 그때 보았던, 눈이 멀 듯한 불꽃의 신. 그 신을 내게 강림시킬 수 있다면 우리는 그 안에서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나는 미친 여자가 되는 게 무섭지 않으니까.
끝으로, 1인칭 화자는 가장 믿을 수 없는 화자라는 점을 기억해주시길.
“그래. 열쇠의 노랑은 안아주는 사탕이 내일이니까.”
“설마. 나의 입술은 맹세코 거짓말을 않으리. 나의 혀는 허언을 뱉지 않으리. 선생, 곧 밤이 온다오.”
“밤?”
“그러하외다. 그 밤은 흑암에 빠져 한 해의 나날에 끼이지도 않고 다달의 계수에도 들지 못하오. 아무도 잉태할 수 없어 환성을 잃은 밤이오. 새벽 별들도 빛을 잃고 기다리는 빛도 나타나지 말고 새벽 햇살도 아예 퍼지지 못하오. 그대의 모태가 그 문을 닫지 않아 그대의 눈이 마침내 고난을 보게 되었구려.”
B는 내 영혼의 북극성이었다. 무언가 고민이 되고 성찰해야 할 문제를 만났을 때 그가 어디로 향하는지를 지켜본 뒤 그가 고른 선택지만 고르지 않으면 최악의 결과는 피할 수 있었다. 만약 내가 내린 결론이 B의 결론과 같을 때는 나 스스로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달리 말하자면, B는 내 전용 ‘윤서인’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C는 곧 손을 씻고 오겠다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B에게 그가 풍전등화에 놓였노라고 어떻게 말해야 하나 고심했다. 하지만 B는 그런 내 속도 모르고서 희희낙락하고만 있었다. 나는 곧 먹잇감이 될 B가 왜 이렇게나 의뭉스럽게 어깨를 들썩이는지 알 수 없었다. 얘는 상황 파악이 안 되나?
“안 오네. 쓰러졌나 보다. 너 있어 봐.”
5분쯤 지났을 무렵인가. C는 그때까지 테이블로 돌아오지 않았다. B는 안달복달하기 시작했다. 이상한 노릇이었다. 아무리 C가 화장실에 간다고 했다가 돌아오지 않고 있기는 했어도, 잠깐 통화를 한다거나 편의점에 들렀을 수도 있지 않은가? 하지만 B는 확신한다는 듯 C의 안부를 염려했다.
나는 B와 단 둘이 있게 된 그 순간, C에 대해 경고하기 좋은 순간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B더러 좀 더 앉아서 나와 대화를 하자고 권했다. C는 아마 다른 볼일이 있는 거 아니겠냐면서 말이다. 그러자 B는 킬킬거리면서 자신의 속내를 밝혔다.
B는 주머니에서 약 봉투를 하나 꺼내 보였다. 특이하게도 그 봉투에는 약국명이 적혀 있지 않았다. B의 이상한 태도. 음흉한 웃음. 수상한 약봉투. ‘C가 쓰러졌나 보다’라는 추측. 이 정도로 단서가 모이자 아무리 눈치 없는 나라도 이게 무슨 상황인지 모를 수 없었다.
“B, 설마….”
“응. 몰래 약 먹였어. 하도 안 대주는데 이렇게라도 해야지. 슬슬 약효가 돌 때니까 난 가서 걔 데리고 올게. 남은 거 비우고 일어나자. 계산은 내가 할 테니까 대신 나갈 때 걔 옮기는 거 좀 돕고.”
“야, 너 지금 뭐 하냐?”
“어른이 주는 생활의 지혜다. 형이 선물로 줄 테니까 너 필요한 때 써라.”
B는 공범끼리의 미소를 지어보였다. 나는 그를 붙잡으려 했지만 그는 나의 만류를 달리 해석한 것 같았다. B는 나에게 약 봉투를 던지고는 자리를 떠났다. 나는 망연자실하게 가게 바깥에 있는 화장실로 향하는 그를 바라보았다. 괴물은 하나가 아니었다.
이것이 내가 B를 혼수 상태에 빠뜨리게 되기까지의 전말이다. 나는 그가 선물로 준 약을, 어른의 지혜를 바로 활용했다. 곧바로 B의 잔에 그 약을 넣어서, 정신을 잃은 C를 끌고 자리에 돌아온 그를 기절시킨 것이다. 다음으로는 구급차를 불러 사정을 설명한 뒤 B와 C를 각각 다른 병원으로 보냈다.
마지막으로 그는 사례라면서 자그마한 조각상을 나에게 주었다. 언젠가 도움이 될 것이라며 말이다. 그 조각상은 형태가 기하학적인 데다 표면의 질감이 광물 같기도 하면서 또 금속 같기도 해, 아마 성능이 뛰어난 3D 프린터로 가공한 물건 같았다.
“화면을 봐! 저 숭고한 존재를! 태고의 아미노산을! 생명은 감칠맛이다! 그리고 숭고한 존재를 올바르게 숭배하는 방법은 그에 도전하는 일이야. 저들은 우리가 주는 사랑이나 존경에는 관심이 없지. 그러니 우리는 그저 저항해야만 해!”
“갔지. 광복 후에 갔는데 난 해방이 되면 일본 놈들뿐 아니라 일본 놈 밑에서 읍장 순사 하던 놈들도 다 없어질 줄 알았어. 그런데 그 읍장 놈이 그대로 읍장을 하고 그 순사 놈이 그대로 순사를 하고 있더라고. 그래, 내가 어쩌겠냐. 잡히면 치도곤을 칠 텐데 다시 도망쳐야지.”
그때 처음으로 무마 -퍼두리들과 아슈타드의 가르침에 회의가 들었어. 나는 이렇게 인간을 죽이지 않기 위해 적당히 먹으며 조심조심 살아가고 있는데, 저들은 같은 사람끼리 서로 수백 수천 명씩 죽여댄다면 내가 인간을 죽이지 않는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나를 숨기고 지키는 것 외에는 별 의미가 없는 게 아닐까.
내가 하워드 러브크래프트라는 미국 공포소설 작가를 좋아하게 된 것은 꽤 오래된 일이다. 현대문학에서 출판한 <하워드 필립스 러브크래프트> 단편선을 읽었고, 깔끔한 듯 하면서도 너무나 넓은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만 읽어서는 내가 다 알아내지 못한 기분이 들었다. 새로이 접한 미지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을 멈출 수 없었는데, 크툴루 신화에 초점을 맞춰서 이것 저것 찾아보다가 <아컴 호러>라는 보드게임을 통해 조금 더 매니악한 오타쿠 계열로 들어선 것 같다. 이후에 브릿G나 바톤핑크 등에서 출판하는 ebook 형태의 러브크래프트 소설을 알게 되었으나 아직까지는 그 책들을 펼쳐보진 않았다.이 시리즈는 SNS의 책 소개글을 통해 알게 되었는데, 러브크래프트가 만들어낸 크툴루 신화라는 세계관을 이용하여 그 세계관 안에 존재하는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한국의 문화나 현대의 삶과 접목시켜 풀어냈다는 점이 정말 흥미로웠다. 실제로는 100~150 페이지밖에 되지 않는 정말 얇은 책이고, 전자책으로는 60~80페이지가 전부였다. 너무 짧아서 아쉬우면서도 그만큼의 미스터리하고 밝혀지지 않는 궁금증들에 더 흥미를 느꼈다.러브크래프트는 인종차별주의자에 남성우월주의자로도 유명한데, 그런 작가의 작품 속에서 다양한 인물들이 현대인들이 느끼는 차별과 편견, 그리고 혐오의 인식에 대한 투쟁을 외치는 것이 신기하게 느껴졌다. 특히나 여성이 주인공인 경우, <낮은 곳으로 임하소서>의 경우에는 크툴루라는 존재 자체를 여성억압에 대해 맞서는 존재로 그려낸 것이 매우 흥미로웠다. <뿌리 없는 별들>의 경우 두 가지의 이야기가 들어있는데 첫번째 스토리의 경우에는 <우물 속의 색채(color out of space)>라는 작품을 모티브로 두고있다. 작품의 세계관은 그대로인데, 한국의 여성 대학연구원이 주인공이 되면서 차별에 대해 항의하고 맞서고 다양한 편견에 의해 고통받고 그렇기에 더 짜증스러운 캐릭터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것이, 그리고 그런 주인공이 이 말도 안되는 판타지 세계관을 통해 현실에서 벌어질법한 일들과 싸우는 상황이 흥미롭게 느껴졌다.이 시리즈는 대부분이 이런 식으로 진행된다. 누군가를 본능적이고 자연스럽게 차별하기 위해 만들어진 소설이 이 시대의 약자를 대변하고, 주변 사람들의 불안과 공포를 위로한다. 현대인들은 참 똑똑하다. 자연스럽게 러브크래프트의 글을 이용해서 그가 가장 쉽게 이용했던 혐오와 차별을 반전시키니 말이다. 이 책을 읽은 모든 이들은 자연스럽게 여성혐오나 사회적 편견, 누군가를 혐오하는 마음, 쉽게 뒷담화를 하는 것, 욕심이나 범죄 등에 대해 마음 속으로 어떤 후회와 반성을 남기게 될 것이 분명했다. <뿌리 없는 별들>에서 두번째 소설인 <공감의 산맥에서>의 경우 <광기의 산맥>을 모티브로 한 작품이었다. 나는 사실 광기의 산맥은 크게 관심이 없는 편인데,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것을 보니 너무 흥미로웠다. 평생을 남자들이 어떤 새로운 발견을 하며 "That's one small step for man, one giant leap for mankind."라고 하는 것이 나는 조금 빈정상한다. 영어권의 여자들은 오죽할까. 인간을 상징하는 동시에 남성을 뜻하기도 하는 Man이라는 단어 말이다. 그래서인지 나는 이 작품에서 끊임없이 "자매들"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좋았다. 여성의 힘이 되는 것은 여성이고, 여성을 응원하는 것도 여성이다. 여성은 여성과 연대한다. 나는 이런 말들을 참 좋아한다. 그래서 더 꿈꾸는 기분으로 글을 읽을 수 있었던 것 같다. (물론 점점 미쳐가면서 쓴 글이라는 설정이지만 말이다.)러브크래프트의 작품들은 꿈꾸는 듯하면서 실제로 존재하지 않기에 환각과도 같고 비현실적이다. 그럼에도 여성들의 현실을 녹여내니 그것이 진실을 드러내기에 너무나 명확한 비현실인 것이다. 이런 점들이 너무나도 신기했다. 평생 영화나 소설을 보며 남자가 주인공인 작품들을 봐왔는데, 이렇게 여성이 주인공인 작품들을 보다보면 감회가 새롭다. 이런 작품들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이 시리즈 중 가장 재미있었던 소설은 <역병의 바다>였지만, 가장 흥미로웠던 소설은 <외계 신장>이었다. <역병의 바다>는 크툴루 신화에서 유명한 지명인 '인스머스'라는 장소를 배경으로 한 것인데, 나는 이 장소와 관련된 이야기를 정말 좋아하고, 보드게임에서도 이 장소가 등장하는 게임을 좋아하기 때문에 재미있었다. 게다가 배경을 동해로 설정하고, 오징어와 문어가 많이 나오는 곳에 심해 크툴루(ㅋㅋ)를 등장시켜버리니 재밌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영웅적인 서사를 가진 여성 주인공이 등장하고, 그 이야기를 전하는 잘생긴 미친 남자가 존재한다는 점이 꽤나 흥미로웠다. 영화로 나와도 재미있을 것 같은데 그렇게 되기는 어렵겠단 생각이 드니 좀 아쉬웠다. <외계 신장>의 경우에는 그레이트원 의 하나일 것으로 추정되는 어떤 외계신과 그에 대항하는 신을 모시는 한국의 만신의 이야기였는데, 이게 정말 흥미로웠다. 사실 각 신이 무슨 신인지 잘 모르겠었는데... 어쨌거나 니알라토텝이 관련된 것 같았다. 한국의 무속신앙과 크툴루 신화를 엮어놓은게 정말 신기하고 재미있었음...이런 소설이 더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이 시리즈가 계속 나오는 중인 줄 알았는데 8권으로 끝났기에 좀 아쉬운 마음이 있었다. 종이책으로 사서 소장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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