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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독서

<여름> 이디스 워튼

2024.07.10. ~ 2024.07.10. (1)

여름

이디스 워튼 저
김욱동 역
민음사 출판
2020년 08월 14일 출간

소설/시/희곡 > 영미소설


여성 최초의 퓰리처상 수상 작가 이디스 워튼의 『여름』. 1차 세계 대전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무렵, 피난민을 돌보며 전쟁의 상처를 수습하던 작가가 단 몇 주 동안의 휴식기에 써 내려간 이 작품은 비극적인 전쟁의 한가운데에서도 “창작의 희열이 정점에 이르러” 집필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 소설은 미국 문단에서 젊은 여성의 성장을 다룬 최초의 본격 문학으로, 주인공인 ‘채리티’가 연인과의 사랑을 통해 자신의 과거를 대면하고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을 그렸다. 성장의 요소로서 특히 여성의 성적 열정을 전면에 내세운 이 소설은 인습과 전통에 맞서 자신의 욕망을 직면하는 여성을 묘사해 미국 문단에 커다란 충격을 안겼다.


“이렇게 작은 도서관이라면 직접 책을 찾아보는 게 훨씬 더 즐거운 일일 테니까요…… 도서관 사서의 도움을 받으면서 말이죠.”

하니가 책상 가까이 다가와 처음으로 자신을 보고 갑자기 입을 다물던 모습을 생각했다. 그녀를 보자 그는 하려던 말을 잊어버렸더랬다. 그의 얼굴이 변하던 것을 기억해 내자 채리티는 벌떡 일어나 아무것도 깔지 않은 마룻바닥을 달려 세면대로 다가갔다. 그리고 성냥을 찾아 초에 불을 붙이고는 하얀 회벽에 걸린 네모난 거울을 향해 들어 올렸다. 보통 때는 그토록 희끄무레하던 작은 얼굴이 희미한 둥근 불빛 속에서 한 떨기 장미처럼 피어났고, 헝클어진 머리카락 아래 두 눈이 대낮보다 더 그윽하고 커 보였다. 어쩌면 그 눈이 푸른색을 띠기를 바라는 것이 잘못 같았다. 표백하지 않은 잠옷은 목쯤에서 볼품없는 밴드와 단추로 잠겨 있었다. 채리티는 단추를 풀어 가냘픈 어깨를 드러냈다. 그리고 신부가 되어 목 아래가 파인 공단 드레스를 입고서 루시어스 하니와 함께 교회 통로를 따라 걸어가는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두 사람이 교회를 떠날 때 그는 그녀에게 입을 맞출 것이다……. 그녀는 그 입맞춤을 간직하려는 듯 촛불을 내려놓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그 순간 로열 씨가 계단을 따라 침실로 올라오는 발소리가 들렸고, 강렬한 혐오감이 일었다. 이때까지 채리티는 단순히 그를 경멸해 왔을 뿐이었다. 이제 그녀의 가슴속은 증오로 가득 찼다. 채리티에게 그는 소름 끼치는 늙은이로 바뀌어 있었다…….

이런 오후에 채리티 로열은 햇빛이 비치는 계곡 위 언덕바지에서 얼굴을 땅에 대고 드러누웠다. 그러면 풀밭의 따뜻한 기류가 몸속을 타고 흘렀다. 하늘을 향해 가냘픈 하얀 꽃과 청록색 잎사귀를 뻗은 블랙베리 가지 하나가 바로 눈앞에 있었다. 그 너머에 소귀나무 덤불이 구슬 같은 잔디의 새싹 사이로 꼬불꼬불한 줄기를 펴고 있었으며, 조그마한 노랑나비 한 마리가 한 점 햇살처럼 그 위에 파르르 몸을 떨었다. 눈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이게 다였다. 그러나 머리 위에서 또 그 주변에서 너도밤나무가 무성하게 자라 산등성이에 옷을 입히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전나무 가지에서 옅은 초록색 솔방울이 통통하게 살이 오르고, 숲 아래쪽 돌 비탈에 소귀나무 잎사귀가 돋아나며, 저쪽 들판에서 단풍터리풀과 노랑꽃창포 싹이 솟아나는 것을 느꼈다. 이렇게 수액이 부글부글 끓고 잎집이 훌훌 옷을 벗고 꽃받침이 터질 듯 차오르는 모습이 온갖 향기에 실려 왔다. 나뭇잎이면 나뭇잎, 꽃봉오리면 꽃봉오리, 잎사귀면 잎사귀가 숨을 불어넣어 향기가 퍼져 나가게 도왔다. 그중에도 코를 찌르는 듯한 소나무 수액이 백리향의 짜릿한 향과 고사리의 희미한 향을 압도했으며, 이 모든 것이 햇볕을 받아 거대한 짐승의 숨결 같은 촉촉한 흙냄새와 하나로 어우러졌다.
지금 누워 있는 언덕바지처럼 채리티는 햇볕에 따뜻해진 몸으로 오랫동안 무기력하게 그 자리에 누워 있었다. 그때 채리티의 두 눈과 너울거리는 나비 사이로 빨간 진흙이 묻은 큼직하고 낡은 부츠를 신은 남자의 발이 나타났다.

“더는 그 푸른색 브로치를 쳐다보며 두려워할 필요 없어. 이제 아가씨 거니까.”

채리티는 아직도 하니가 전기 마차 기사에게 준 10달러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 돈으로 그들은 이십 분 동안 즐거운 시간을 보냈고, 누군가가 그렇게 비싼 돈을 주고 즐거운 시간을 살 수 있으리라고 그녀는 좀체 상상할 수 없었다. 10달러로 그는 약혼반지도 사 줄 수 있었을 것이다. 스프링필드 출신인 톰 프라이 부인이 끼고 있는 반지에 대해 채리티는 잘 알고 있었다. 다이아몬드가 박힌 반지도 겨우 8달러 75센트밖에 안 되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왜 그런 생각이 갑자기 떠올랐는지 알 수 없었다. 하니는 절대 약혼반지를 사 주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다만 친구요 동료일 뿐이었다. 하니는 채리티를 더할 나위 없이 공정하게 대했다. 지금껏 그녀가 오해할 만한 말을 한마디도 건넨 적이 없었다. 채리티는 과연 어떤 아가씨가 손가락에 그의 반지를 끼게 될까 생각해 보았다…….

채리티는 반항심이 이는 순간에 늘 그러듯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난 저 ‘산’으로 갈 테야……. 내 가족들한테 갈 거란 말이야.” 전에는 한 번도 진심으로 말해 본 적이 없었는데 지금 자기 처지를 생각할 때는 이 길밖에 다른 방법이 없어 보였다.

“내 집으로…… 저기 저쪽, 저 ‘산’ 말이야.”

하니는 두 팔로 채리티를 껴안았고, 그녀의 머리카락과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하니의 입맞춤에 그녀 몸속에 깊이 잠들어 있던 것들이 온 힘을 다해 빛을 향해 꿈틀거리더니 햇빛 속의 꽃처럼 활짝 피어올랐다. 채리티가 그의 손가락에 깍지를 끼었고, 그들은 임시로 만든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 채리티는 늦게 온 데 대해 변명하는 말이 거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하니가 오지 않는 동안 온갖 의구심이 괴롭혔지만 그가 나타나자마자 어디에서 왔는지, 왜 늦었는지, 누구한테 붙잡혀 있었는지는 더 이상 궁금하지 않았다. 마치 자기 삶이 그가 없는 동안 허공에 매달려 있는 것처럼 그가 있었던 장소, 그와 함께 있었던 사람들도 그가 떠나자 존재하지 않는 것만 같았다.

채리티는 하니가 두 팔로 안아 주기를 기다렸지만 그는 우유부단하게 몸을 돌렸다. 마지막 빛이 ‘산’ 너머에서 사라졌다. 방 안의 모든 물건이 회색으로 변해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었고, 가을의 냉기가 과수원 아래 골짜기에서 올라와 두 사람의 상기된 얼굴을 차갑게 어루만졌다. 하니는 방 끝까지 걸어갔다가 걸어와서는 식탁에 앉았다.

“자, 한 가지 더 말해 주지. 내가 알고 싶은 건 말이다, 네가 나하고 결혼할지 말지뿐이야. 그 밖의 다른 게 있다면 너한테 그렇다고 말해 줬을 거야. 하지만 없어. 내 나이가 되면 중요한 문제와 중요하지 않은 문제를 구별할 수 있게 돼. 나이가 들면서 얻는 유일하게 좋은 변화라고나 할까.”


이디스 워튼은 <이선 프롬>과 <여름>을 오디오북으로 들으면서 좋아하게 된 미국의 작가이다. 미국 상류층으로 태어났다고 하는데,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살았던 이유에서인지 <순수의 시대> 같은 글이 아니어도 <여름>과도 같은 이야기를 잘 써낸 것 같다. 여름이 왔으니 다시 읽어볼까 하고 있었는데 독서모임의 이번달 도서로 선정되어서 타이밍 좋게 읽게 되었다.

이디스 워튼의 <여름>은 내가 목소리를 좋아하던 성우가 하니 역할을 맡았었던 터라 오디오북을 읽게 되었던 소설이었다. 지금은 그 성우 이름도 기억이 안나는데... 하니의 이미지가 그 성우의 목소리에 덧입혀지면서 다정하고 스윗하고 매력적인 도시남자 그 자체였다. 시골에서 산사람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지내던 채리티에게 하니라는 존재가 얼마나 반짝이는 별 같았을지... 보통의 로맨스 소설과 별다른 차이가 없는 소설이기는 하지만, 채리티라는 인물이 당시의 여성들과는 다르게 자신의 사랑을 강하게 주장하고 자신을 '소유'하고 있는 남성에게 강하게 부정하는 등의 행위 들이 당시에 꽤나 노골적이고 색다른 이야기였던 것 같다. 21세기의 여성인 나 또한 그런 부분을 흥미롭다 여긴다.채리티가...16살이던가. 18살이던가... <여름>을 오디오북으로 처음 들었을 때를 보니, 2023년 7월 8일이었다. 우연히도 지금 읽는 것과 시기가 겹친다. 나는 당시 수영장에 다니고 있었는데, 자전거를 타고 하천 산책로를 달려 수영장을 다녔다. 그때 오디오북으로 <여름>을 들었는데, 그 때의 이미지가 여전히 지금도 남아있어서 그런지 <여름>을 생각하면 풀의 연한 녹빛과 파란 하늘, 그리고 맑은 태양의 노란 빛들이 떠오른다. 채리티가 하니와 데이트를 하며 보냈던 그 하루가 너무나도 눈부시고 우리가 상상하는 그 여름 한 날의 꿈과도 같아서 더 소설이 눈부시다는 기분이 드는 것 같다. 결국 이야기의 흐름은 채리티가 좌절할 수밖에 없게끔 흘러가지만 말이다...이번에 내가 책을 읽는 동안에는 토론토에 엄청난 비가 쏟아졌다. 폭풍우가 쏟아지는 날에 여름을 읽으니 하니도 무심하고, 로열씨는 사악하게 느껴졌다. 하니가 겪은 그 꿈같은 하루가 너무 눈부신데도 불구하고 우울하게 느껴졌다. 내년에는 꼭 눈부시게 맑은 날에 햇볕 아래에서 여름을 읽겠노라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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