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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독서

<손상된 행성에서 더 나은 파국을 상상하기> 손희정

2024.04.12. ~ 2024.04.14. (3)

손상된 행성에서 더 나은 파국을 상상하기

손희정 저
메멘토 출판
2024년 02월 19일 출간

국내도서 > 사회 정치 > 사회비평/비판 > 한국사회비평


라디오, 방송, 유튜브, 신문 등 다양한 플랫폼을 전방위로 오가며 대중들과 긴밀하게 소통해온 손희정 문화평론가가 코로나19 바이러스의 발생과 확산을 겪으며 지난 3년간 공글린 사유의 기록. 그는 지구 행성적 차원의 위기에 직면해서도 가속을 늦추지 않는 ‘인간 행동의 원인’을 알고자 부단히 읽고 보았고, 여기에 거대서사가 지워버린 작은 것들과 함께해온 페미니스트 인식론과 ‘조각보’처럼 이어진 사유의 목록을 제시한다.

“어떻게 하면 인간 너머를 말하되 파괴적인 인간 혐오에 빠지지 않을 수 있을까?” 저자는 혐오와 냉소에 빠져 “우리 다 망했다”라고 비명을 지르기보다 다양한 사유의 얽힘 속에서 비로소 가능해지는 대안을 찾아보자고 제안한다. 휴머니즘, 발전주의 진보사관, 부계혈통주의, 이성애중심주의, 군사주의, 자본주의, 종차별주의는 근대의 지배적 이데올로기다. 그는 이를 전복하는 대항 역능(puissance)의 마디들인 쑬루세, 신유물론, 페미니즘, 오드킨, 포스트휴먼, 돌봄/의존, 레퓨지아의 상상력으로 파국 너머의 새로운 가능성을 이야기한다.

기예르모 델 토로의 [피노키오]와 오드킨, 포스트휴먼의 구체적 형상을 보여주는 [서던 리치: 소멸의 땅], 지구에서 사라지고 있는 다양한 생명 종의 피난처, 레퓨지아에 대한 이야기 [스위트 투스], 그리고 쑬루세의 진정한 의미를 만날 수 있는 다큐멘터리 [수라]까지. 페미니즘으로 분류되지 않는 다양한 관람과 독서 목록, 그리고 이들에 대한 정치(精緻)한 분석과 비평은 인식론적 전환을 일으키는 대안 담론들을 더 깊고 풍부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안내한다.


극장에서 인간이 지구를 망치고 있다고 외치는 다큐멘터리가 상영되는 와중에 부대 행사에선 인간 따위가 지구를 망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이가 ‘기후위기론자’들을 비웃었다. 그에 따르면 기온 상승은 간빙기 때문으로, 지구사의 운명과도 같은 것이었다.

이 작품의 가장 뛰어난 점은 ‘중국-박쥐’에게 질병의 원죄를 물었던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를 지탱해 온 전 지구적 분업 체제를 시각화한 것이었다. 영화는 홍콩의 오지에 서식하는 박쥐에 기생하는 코로나바이러스가 어떻게 미국의 글로벌기업에서 일하는 백인 엘리트 여성에게까지 도달했는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세계화가 어떤 역할을 했는가를 촘촘하게 묘사해낸다. 미국에 본사를 둔 다국적기업이 원료 원산지인 아시아를 난개발하면서 야생 삼림이 파괴된다. 이 탓에 인간과 박쥐 서식지의 거리가 가까워지고, 박쥐에 기생하는 바이러스가 목장에서 사육하는 ‘식용 돼지’의 몸으로 이동한다. 그 돼지를 요리한 요리사가 다국적기업의 임원과 악수를 나누면서 바이러스는 ‘감염병’으로 활성화되고, 전염원인 인간과 함께 비행기를 타고 미국으로 건너간다.

영화가 전염병의 감염 경로를 그리면서 미국과 아시아를 극명하게 대비하는 방식이다. 아시아는 바이러스의 산지(産地)로서 원시성의 이미지에 갇히고(마천루의 도시이자 한때 아시아 금융의 중심지였던 홍콩인데도 말이다) 미국은 결국 바이러스라는 원시적인 적을 극복하는 문명국의 자리에 배치된다. 이건 한편으론 이미지가 유통되는 글로벌 시각장(視覺場)*이 소위 ‘세계화’라는 그럴듯한 이름으로 포장된 ‘지역적 불균등 발전’(데이비드 하비,2014)과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을 의도치 않게 폭로한다. ‘손을 씻지 않는 홍콩 요리사’라는 이미지를 별 고민 없이 사용하는 게으름은 코로나19(Covid19)라는 공식 명칭을 두고 굳이 ‘우한 바이러스’라고 부르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혐오 정서와 하나의 뿌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야생동물을 먹는 ‘괴식 문화’는 중국인만의 풍속도 아니고, 야생동물로 인해 인간이 인수공통감염병에 취약해진 건 서구 문명이 ‘정상적인 산업’이라고 생각하는 가축 사육의 과도한 확장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서구는 언제나 타자에게 야만의 낙인을 찍으면서 정치, 경제, 문화적인 헤게모니를 확보하고 지금의 세계 질서를 정당화해왔다. 이런 이미지의 배치 속에서 〈컨테이젼〉이 과속방지턱 하나 없이 미국식 영웅주의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누군가 “미국 질병관리국 홍보영화 같다”라며 비아냥거린 건 이 때문이었다.

시장성 없는 백신은 만들어지지 않는다. 테크놀로지는 자본 위에 서 있는 과학의 다른 이름이고, 이런 테크놀로지로는 바이러스에 완벽하게 대응하기 어렵다. 시장과 자본은 인간의 생명을 구하는 것에 크게 관심이 없을 뿐만 아니라, 대체로(의도적으로) 무능하다.

개발의 가속을 멈추지 않는 테크놀로지가 불사의 영웅을 탄생시키리라 믿고, 특정한 ‘남성적’ 신체성을 지닌 자가 끝내 살아남으리라는 능력 중심적이고 젠더화된 생존주의를 내면화하며, 더 강력한 무기가 우리를 지키리라는 전투 판타지에 기대게 된다. 그래도 괜찮을까? 우리는 세상을 좌지우지하는 ‘지배적 허구(dominant fiction)’에 대해 좀 더 비판적으로 사고할 필요가 있다.

처음 인류세 개념이 등장했을 때 이를 과학적으로 증명 가능한 하나의 지질연대로 볼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했다.* 무엇보다 쓰레기가 일부 문명권에 몰려 있을 뿐 전 지구적으로 균질적으로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부 과학자들은 인류세가 과학적, 지질학적 개념이라기보다는 사회적, 문화적으로만 추적 가능한 개념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렇게 시작된 인류세 담론은 현상을 진단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원인을 규명하고 극복을 위한 대안을 상상하고자 하는 흐름과 만났다. 그리고 이를 하나의 비평적 개념으로 보면서 정치경제적인 문제에 대한 분석으로 확장하고자 하는 논의들이 등장했다. 그리하여 인류세 대신 자본세(Capitalocene), 남성중심세(Androcene), 플라스틱세(Plasticene), 대농장세(Plantationocene), 휘발류세(Petrolcene) 등으로 불러야 한다는 주장들이 담론장에서 경합을 벌이는 중이다. 지금의 지구 행성적 위기를 불러온 가장 치명적인 원인을 무엇으로 지목하느냐에 따라서 이 시기를 규정하는 이름 역시 달라지는 셈이다.

쑬루는 분해와 재생산의 능력을 지닌 지하 생명체들을 연상케 하는 말로 공-지하적(sym-chthonic) 힘, 즉 땅이 가진 분해 및 재생산의 거대한 역량을 고려하자고 요청하는 의미의 용어다.

자신이 자연의 일부인 걸 모르고 신나게 바닷속에 콘크리트를 처박아 넣는 인간이 있다면, 자연이 준 것을 감사히 여기며 그 안에서 자신의 몫을 다하고자 하는 인간도 있다. 파괴하고, 세우고, 부풀리고, 그렇게 거대해진 몸집을 과시하며 자신의 인간됨을 확인하는 자들이 있다면, 조용히 바라보고, 지키고, 응원하고, 녹아들면서 자신의 인간됨을 실천하는 이도 있는 것이다.

〈물의 길〉에 이르면, 전작인 〈아바타〉까지도 비장애인 중심의 군사주의를 진부한 남성 영웅 서사에 버무려놓은 퇴행적인 작품이 아닌가 하고 의심하게 된다. 여기에는 남성과 여성을 나누는 성별 이분법뿐 아니라, 북반구/남반구, 과학/자연, 육체/정신, 물질/비물질 등의 각종 이분법이 자리한다. 그리고 이 이분법 안에서 인간의 정신이 아바타의 신체를 정확하게 조종할 수 있다는 주체성에 대한 환상은 작가/감독이 모든 이미지를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다는 도착적인 제어 욕망과 겹친다.

북반구가 남반구의 생명을 죄의식 없이 침탈할 수 있었던 건 본인들의 역사가 새겨지지 않은 땅을 텅 빈 ‘황무지(wilderness)’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존재하지 않았던 시간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던 시간인 것처럼 상상했다. 마치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기 전에 아무것도 없었지만, 단7일 만에 세계가 존재하게 된 것처럼. 하나님의 형상을 한 백인은 이제 그 황무지 위의 어떤 것이든 취해서 무엇이든 지어낼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그들이 자연이라 여긴 것들은 “비활성의 자원 저장고”(아미타브 고시2022,55)로서 착취당했다. 하지만 테란들은 그 ‘황무지’에서 모든 것의 존재를 봤다.

〈말레피센트〉는 지금까지 디즈니가 선보였던 “진정한 사랑의 키스”를 재해석하면서 여성 연대의 상상력을 펼쳐놓는다. 이런 재해석은 〈겨울왕국〉 역시 선보인 것이다. 엘사의 얼음이 안나의 심장에 박혔을 때, 저주를 풀었던 것은 안나의 남자들인 한스나 크리스토프의 키스가 아니라 엘사를 위해서라면 목숨도 기꺼이 내놓을 준비가 된 안나 자신의 마음이었다. 〈말레피센트〉에서는 ‘대안적 모성’이, 〈겨울왕국〉에서는 ‘자매애’가 가부장제의 오래된 여성 혐오적 편견인 ‘여적여(女敵女)’의 프레임을 깨고 여성 연대의 상징으로 등장한다.*

페미니즘은 근대적 휴머니즘이 상상하는 ‘인간의 얼굴’에서 배제된 여성들의 얼굴을 포함하기 위해서 노력해왔다. “페미니즘은 여자도 사람이라는 급진적인 개념”이라는 말은 이런 역사로부터 등장했다.* 그리고 여전히 소녀도 ‘백마 탄 왕자를 기다리는 공주’가 아닌 ‘위대한 지도자-여왕’이 될 수 있다는 당연한 이야기는 실천하기 어려운 상상력이다. 그러므로 시장 페미니즘(marketplace feminism)(자이슬러,2018)의 흐름을 선도하는 디즈니에서 이런 자유주의적 휴머니즘을 주요 관심사이자 주제로 다루는 것은 특별히 이상한 일이 아니며, 디즈니 페미니즘이 여는 새로운 여성 서사의 가치는 쉽게 폄하할 수 없다. 하지만 그런 도전과 성취의 이야기들이 마치 매직아이처럼 흙과 물과 눈 속에 파묻힌 영토의 경계를 드러내고 그것을 선명하게 긋는 것은 대중문화의 상상력에 뿌리내린 군사주의적 세계관과 그에 기대는 국경의 감각 때문이다. 이 문제는 ‘겨울왕국’ 시리즈1편과2편에서 엘사-안나 자매의 부모가 차지하는 서사적 위상의 변화에서 좀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

‘인류의 종말’ 이후의 인간이란 대체 무엇인가? 인류가 종말했는데 인간은 살아남을 수 있다는 말인가? 정치철학자 존 그레이의 언어를 경유해 설명하자면 이렇다. 존 그레이에게 ‘인류’란 “수십억 명의 개인들로 구성된 허구”를 의미한다. 일종의 ‘상상의 공동체’인 셈이고, 이런 인위적인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서 작동하는 강력한 지배적 허구가 진보 사관에 기댄 ‘인류 문명사’다. 하지만 역사 역시 환상에 불가하다. 만약 우리가 “인간이라는 종의 역사를 이야기한다면, 이는 각 인생의 알 수 없는 총합을 뜻하는 것일 뿐”(존 그레이,2014)이다. 그럼에도 불구하도 우리가 기어코 ‘인류의 역사’를 말하고자 한다면, 우리가 이로부터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진실은 역사는 두 번만이 아니라 세 번이고 네 번이고 계속해서 반복된다는 사실일 것이다. 각종 재난과 참사, 그리고 지금 우리가 경험하는 파국의 상황들이 재차 확인해주듯이 인간은 역사로부터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다. 그레이의 말처럼 지식은 축적될 수 있으나 지혜는 쌓이지 않는 것이다. 어쩌면 이 팩트의 직시야말로 컴퓨터가 시를 짓는 시대에도 인간에 대한 무차별한 학살이 지속된다는 사실을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이런 의미에서 ‘인류의 종말’은 북반구 중심적 역사관의 종말에 가깝고, 인류가 종말했다고 해서 구체적 실체로서 인간이 멸종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보통 손상과 장애를 같은 것으로 이해한다. 생물학적 차이인 섹스를 사회적으로 구성된 젠더와 같은 것으로 보는 것과 비슷한데, 이런 사고방식 속에서 ‘장애’를 문화적으로 구성된 것이 아닌 일종의 생물학적 운명이자 본질적인 것으로 받아들인다. 장애학에서는 이 지점을 비판하고 손상과 장애를 구분하여 다룬다

〈퍼펙트 케어〉는 일견 성공을 위해 물불을 안 가리는 알파걸과 자신이 대단한 효자라고 믿는 마피아 두목 사이의 신나는 한판승부처럼 보이지만, 의존과 돌봄의 관점에서 들여다보면 완전히 다른 작품이 된다. 영화는 돌봄이 무가치하게 여겨지는 시대에 오히려 돌봄이 거대한 블루오션이 되는 모순을 정확하게 보여주고, 그 모순 속에서 펼쳐지는21세기 자본주의의 지옥도를 그려낸다. 우리 앞에는 ‘노동력’이 아닌 ‘인간’ 자체를 자원으로 착취하는 세계가 열렸다. 자, 어떻게 할 것인가?

『돌봄 선언』은 그 예로 “선택 가족(families of choice)”을 언급한다.
이 용어는 제2세대 페미니즘과 함께 일어났던 성소수자들의 정치적 운동과 관련하여 처음 생겨났다. 원래는 아이 돌봄보다는 생물학적 가족은 아니지만 친밀한 관계를 일컬었는데, 특히 성소수자 커뮤니티 구성원들에게 가장 의미 깊은 말이었다. 선택 가족은 비규범화된 성이나 젠더를 표방하는 사람들이 가족으로부터 거부당하자 생겨났고 지금도 생겨나고 있다. 성소수자들은 ‘게이 동네’로 이사 가서 그들의 돌봄에 대한 필요를 충족시키는 친구나 연인과 함께 살면서 가족 같은 관계를 만들었다. 이는 필요에 의한 것이었지만 돌봄과 친밀함의 관계를 법으로 규정된 이성애 관계를 넘어선 범주로 확장하려는 급진적인 게이 해방 운동의 일부로 옹호되었다.(더 케어 컬렉티브2021,70)

그는 포스트모더니즘 논의들이 이런 반인간적 태도를 견지하고 있었음에 주목하면서 인간의 새로운 철학과 포스트휴먼적 사유를 “냉소적이고 허무적인 인간 혐오와 혼돈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근대적 휴머니즘을 비판하고 인간 이후를 상상하고자 하는 흐름 안에서 인간 종의 목숨은 너무 자주, 그리고 너무 쉽게 하찮게 여겨진다. 스스로를 과대평가하지 않는 것은 중요하지만, 스스로를 하찮게 여기는 존재가 과연 타자는 존중할 수 있을까.


문화평론가인 손희정이 다양한 영화들을 언급하며 환경과 인간사회에 대해 말한다. 다양한 철학적 용어, 사회학적 용어들이 언급되며 영화를 깊이있게 풀어내고 해석한다. 나는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고, 언제나 이런 방식으로 영화를 해체하고 이해하는 것에 대해 동경을 하고 있기 때문에 이 책을 정말 재미있게 읽었다. 게다가 내가 관심이 많은 환경 분야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시대에 대한 분류, 사람들이 환경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환경은 어떻게 파괴되고 있는지 등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주 흥미로웠다.

사실 이 책을 고른 이유는 단 하나였다. 너무나 제목이 흥미롭지 않은가? <손상된 행성에서 더 나은 파국을 상상하기>라니. 흥미를 끌어내다 못해 당장 책을 펼쳐보지 않을 수 없게 하는 책이었다. 게다가 책은 약 220페이지로 짧은 편이기 때문에 간단하게 읽어볼 수 있는 책이라서 좋았다. 나는 전자책으로 읽었기 때문에 100페이지 가량의 분량이 나왔는데, 책이 이정도로 짧더라도 나한테는 전혀 가벼운 내용이 아니었고, 이 책에서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들은 결코 허투루 표현된 것이 없었다.

시네필이 아니더라도 알만한 영화들이 소개되지만, 개중 영화를 그리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대체 이 영화는 뭐야?"하는 짜증을 품을 수 있는데, 이 책에서는 자신이 설명하기 위한 영화의 상황들을 간략하게 설명하며 이 장면을 언급하는 이유에 대해 설명한다. 게다가 중간중간 나오는 어려운 단어들이나 전공자 혹은 관심분야가 아닌 사람들이라면, 정치나 환경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라면 "아니 이게 대체 무슨 말이야!" 하는 단어들이 많이 이용되기도 한다. 사실 나 또한 그랬는데, 그런 것들은 사전을 검색해보며 쉽게 이해했다. 이렇게 내용이 어렵고 다양한데도 불구하고 흥미로운 이유는, 책 내용 중간중간에 작가가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거나, 어떤 상황들에 대해 비꼬면서 그것들을 유쾌하게 이야기하기 때문이었다. 아주 흥미로운 강의를 듣는 기분이었고, 발표자의 센스있고 재치넘치는 이야기에 졸음이 달아나는 느낌을 경험했다. 정말 재미있고 흥미로운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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