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9.25 ~ 2023.09.28 (4)
고통에 관하여
정보라 저
다산책방 출판
2023년 8월 31일 출간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생각의 파도에 휩쓸리게 되는 매혹적인 소설!”
부커상 최종 후보, 정보라 4년 만의 신작 장편소설
『저주토끼』로 부커상 최종 후보에 오르며 국내를 넘어 전 세계 독자들에게 충격을 안겨준 작가 정보라의 신작이 다산책방에서 출간된다. 『고통에 관하여』는 붉은 칼 이후 4년 만에 선보이는 장편소설로, 정보라 특유의 치밀하고 치열한 설정과 서늘하게 파고드는 문장, 어둡게 번뜩이는 사유가 더욱 돋보인다. 이야기는 고통을 무력화시킨 진통제 ‘NSTRA-14’를 만든 제약회사와, 고통이 인간을 구원에 이르게 한다고 주장하는 종교단체의 갈등에서부터 시작된다. 정보라는 소설이라는 매혹적인 가능성의 도구를 통해, ‘고통’이라는 감각의 뿌리까지 낱낱이 해부하며, 독자들에게 철학적 통찰과 내면을 집요하게 찌르는 이야기의 쾌감을 동시에 선사한다.
“왜 그랬습니까?”
남자가 여자의 흉터를 보며 물었다.
“평생 눈에 보이게 하려고”
여자가 대답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니까 흐려져”
그래서 욱은 자신의 삶의 의미를 직접 찾아내기로 마음먹었다. 자신이 어째서 그토록 고통받고 절망해야 했으며 또 어째서 갑자기 그 고통에서 벗어나야 했는지 아무도 욱에게 납득할만한 설명을 제공할 수 없었으므로 욱은 직접 찾아내야 했다. 시간은 많았다.
앞으로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다고 생각했던 삶이 갑자기 주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삶을 어떻게 살고 그 시간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아무도 명확하게 말해주지 않았다. 갑자기 주어진 삶은 온전히 욱의 것이었다.
초월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고통을 극복함으로써 대체 무엇을 얻으려 하는가.
그러나 고통을 느끼면 인간은 선택의 기로에 처한다던 지도자의 강연은 틀렸다. 엽은 그 순간 자신에게 선택지가 있다고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아무 선택지도 결정권도 없이 폭력과 신체적 위협을 감내해야 했기 때문에 엽은, 더 정확히는 엽의 신체는 그 상황에서 무조건 탈출해야 한다고 결정 했다. 그것은 절박하고 비이성적인 결정이었으며 초월이나 깨달음에 전혀 가깝지 않았다. 이름을 붙여 정의해야 한다면 그 감각은 퇴보나 타락에 더 가까웠다.
"건방지게 나한테 성별이분법 들이대지 마라." 륜 형사가 엄격한 표정으로 훈계했다. 순 형사는 웃었다. 륜 형사가 잔소리했다.
"인간의 성별은 스펙트럼이야. 공부 좀 해."
"전 인간도 싫고 스펙트럼도 싫어요. 집에 가서 고양이하고 놀래요"
정보라 작가님의 글에는 항상 카리스마가 느껴진다. 사람마다 문체가 다르고 분위기도 다르고 글의 성격도 다르다는 것은 잘 알고 있지만... 정보라 작가님의 프로필 사진부터가 그런 느낌이다. 이 사람의 사진도, 글도 카리스마가 느껴진다. 2023 국제 도서전에서 잠깐 뵈었던 적이 있다. 그때도 카리스마를 느꼈다. 어떤 포스가 느껴졌다. 그래서 너무 좋았다. 내가 좋아하는 글을 쓰는 사람이 줏대있는 사람 같아서...
나는 종종 일명 독서의 축복을 받았다고 말한다. 이 축복은 박상영의 <대도시의 사랑법>이 시작이었고, 오세영의 <베니스의 개성상인>으로 부스터를 올렸으며, 종이책에 맛을 들이기 시작한 것은 정보라의 <저주토끼>였다. 베니스의 개성상인부터는 오디오북을 많이 들었는데, 엄마의 갤럭시S23 윌라 6개월 무료구독 특전이 큰 몫을 했다. 오디오북으로 소설에 맛을 들리기 시작했고, <저주토끼>가 오디오북으로 나온다는 광고문구를 보게되었다. 나는 이 책에 운명처럼 이끌렸다. 그래서 바로 도서관으로 달려가 이 책을 빌렸다. 도서관에서 <저주토끼>를 집어들었을 때는 328페이지의 책이 너무나 두껍게 느껴졌다. 책도 잘 안 읽고, 오디오북만 들었으니 당연했다. 그런데 <저주토끼>를 읽었더니, 정신을 차리니 100페이지로, 눈을 감았다 뜨니 200페이지로, 가슴이 벅차오르기 시작하니 300페이지에 도착해 있었다. 와. 이런 글을 쓰다니. 이런 상상력이라니. 어마어마한 상상력에 이런 뜻을 담다니. 친구를 붙잡고 한시간이 넘게 말했다. 이 작가가 그런 의도를 갖고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문장에선 이런 의미가 느껴지고, 이런 사회상이 느껴지고, 이런 여성의 애환이 느껴지고, 이런 사회적 불합리가 느껴져. 너도 읽어봐! 그 때가 처음이었다. 타인에게 내가 읽은 책을 추천한 것 말이다. 그 이후로 정보라 작가님을 변태처럼 스토킹하는 상황이 발생했는데, 수줍음이 많아서 북토크같은 행사는 항상 신청하지도 못하고 핸드폰 화면을 끄곤 했다.
<고통에 관하여>는 출판 직후에 바로 구매했지만, 당시 <어리석은 장미>를 읽고 있었고, 내가 너무 SF소설만 많이 본다는 생각이 들어 청소년 문학인 <너도 하늘말나리야>와 <소희의 방> 그리고 <숨은 길 찾기>를 읽었고, <극장 앞에서 만나>를 읽었다. (지금 보니 <극장 앞에서 만나>의 리뷰를 빼먹었다. 바보) 책 읽는 것에 맛을 들이니 속도가 빨라져서 하루 이틀이면 책 한 권을 다 읽었다. 하루에 두 권을 읽는 날도 있었다. <고통에 관하여>는 친구를 만나러 가는 버스에서 읽기 시작했다. 멀미가 온다는 기분이 들어 책을 그만 읽어야겠다 했는데 그때가 100p쯤을 읽던 때였다.
내가 이 소설에 더 열광하는 이유는, 내가 한 때 제약회사 취직을 꿈꿨기 때문이다. 진로선택을 잘못한 주제에 제약회사를 꿈꾸다보니 영원히 닿을 수 없는 선망의 업계가 되어버렸다. NSTRA-14라는 진통제가 등장하면서 세상 사람들은 어떠한 고통도 느끼지 않게 되었는데, 이로 인해 사람들은 더이상 아프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런데 이런 큰 변화가 있으면 언제나 혼란이 탄생하기 마련이다. 고통을 신봉하는 사이비 종교가 탄생한 것이다. 이 소재 자체가 너무나 독특하면서도 한번쯤은 상상해봤을 내용이라 재미있게 느껴졌다. 언젠가 나는 이런 내용을 상상해봤을지 모른다. 무언가 없어지면, 그 없어진 것을 신처럼 떠받드는 사이비 종교가 나타날 것이라는. 미래의 사람들은 모르는 그 과거의 존재를 이용해 사람들을 휘두르는 사이비 종교가 나타날것이란 이야기를, 나는 한 번쯤 생각해봤던 것 같다. 하지만 그건 그냥 문장 한 줄로 끝났을 일이었다. 내가 생각했을 이야기니 별로라는 뜻은 아니다. 내가 꿈꾸던 것을 내가 상상하던 방식으로 완성된 것을 보니 신기한 마음도 들었다.
고통, 제약회사, 사이비 종교라는 소재만으로 이미 매우 자극적이다. 그런데 이런 소재 속에 다양한 인물들을 만들고, 다양한 이야기를 녹여내고, 다양한 고찰을 풀어낸 점이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예를 들어, 어머니가 살아남기 위해 아들들을 데리고 사이비종교에 들어갔는데, 첫째 아들은 신봉자가 되어있고, 둘째 아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교단이 시키는대로 하다가 탈출한다. 이런 이야기는 흔히 있을 수 있는 소재라고 하지만, 이에 대해 묘사된 책 속의 세 인물의 이야기가 매우 복잡하고 거대했다.
재미있는 이야기 속에 의미심장한 발언을 녹여내는 것이 이 작가의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보통 다른 작가들도 이런 글을 많이 쓰지만, 이 작가의 문체나 분위기나 글의 소재가 내 취향이어서 그런지 더 좋아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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