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2023 독서

<아침 그리고 저녁> 욘 포세

2023.11.21. ~ 2023.11.21. (1)

아침 그리고 저녁
Morgen und Abend

욘 포세 저
박경희 역
문학동네 출판
2019년 7월 26일 출간

소설/시/희곡 > 북유럽소설


욘 포세, 2023년 노벨문학상 수상
시적이고 음악적인 문체로 묘파하는 인간의 삶과 생존투쟁, 그리고 죽음
소설의 시작에서 아이의 탄생을 앞둔 아버지는 말한다. 거리의 악사가 훌륭한 연주를 할 때, 그의 신이 말하려는 바를 조금은 들을 수 있다고, 신이 거기 있다고. 하지만 사탄이 이를 좋아할 리 없으니, 정말 훌륭한 악사가 연주하려 하면, 늘 많은 잡음과 소음을 준비한다고. 이 책이 만들어내는 음악은 특별히 나직하고 고요할뿐더러 짧다. 많은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별다른 사건이 일어나지도 비범한 인물이 등장하지도 않고, 화려한 미사여구로 눈길을 끌지도 않는다.
무대 위에서 독백을 들려주는 배우처럼 주인공 내면의 목소리가 쉴새없이 울리는 데 비해 인물들끼리의 대화는 과묵하고 삭막하기 그지없다. 침묵으로 여백이 깃들고, ‘그래’ ‘아니’ ‘그리고’와 같은 단어가 반복되며 특별한 리듬이 만들어진다. 무에서 무로, 그것이 살아가는 과정임을, “삶 속의 죽음, 죽음 속의 삶”을 이야기하는 그 음악은 너무 아름답기에 사탄의 방해는 그저 헛되지 않은가. 욘 포세는 단순하고 간결한 언어로 심오한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쉼표 너머의 침묵, 그 내밀한 뉘앙스를 채워가는 것은 독자들의 몫이다.


그러나 물건들은 제각기 지금까지 해온 일들로 인해 무겁고, 동시에 가볍다, 가능할 수 없을 만큼, 요한네스는 생각한다, 상상해보라, 세탁기가 생기기전에 에르나가 저 통을 얼마나 자주 사용했는지, 저 안에다 얼마나 많은 빨래 를 했는지, 그래 결코 적지 않은 빨래였다, 그리고 이제 에르나는 가고 없는데 빨래통은 여전히 남아 있다, 그런 것이다, 사람은 가고 사물은 남는다,

그는 자신이 믿고 싶은 것을 믿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믿고 싶은 것을 믿게 두 었다, 자신이 믿는 신은 이 사악한 세상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고, 구두장이 야코프는 말했었다. 무슨 수로 자애롭고 전지전 능한 신이 이 세상을 지배한다는 것을 믿으라는 거지요? 구두장이 야코프는 말했다, 제가 믿는 신과 진실을 보고자 하는 사람들의 신은 이 세상을 위한 신이 아니에요. 그런 신도 세상에 존재하 지만, 세상을 다스리는 것은 다른 신들입니다, 이 세상의 다른 신 말이에요, 구두장이 야코프는 말했다.

비바람이 불고 파도도 높으니까 그리고 페테르의 고깃배가 파도에 휩쓸려 올라갔다 떨어지더니 그들은 더이상 페테르의 고깃배가 아닌 다른 배에 앉아 바다 위에 떠 있다 그리고 하늘과 바다는 둘이 아닌 하나이고 바다와 구름과 바람이 하나이면서 모든 것, 빛과 물이 하나가 된다 그리고 거기, 에르나가 눈을 반짝이며 서 있다. 그녀의 눈에서 나오는 빛 역시 다른 모든 것과 같다, 그러고 나서 페테르가 더이상 보이지 않는다
그래 이제 길에 접어들었네, 페테르가 말한다 그리고 페테르와 그는 그 자신이면서 동시에 아니기도하다, 모든 것이 하나이며 서로 다르고, 하나이면서 정확히 바로, 그 자신이기도 하다, 저마다 다르면서 차이가 없고 모든 것이 고요하다 그리고 요한네스는 몸을 돌려 저멀리 뒤편, 저 아래 멀리, 싱네가 서 있는 모습을 본다, 사랑하는 싱네, 저 아래, 멀리 저 아래 그의 사랑하는 막내딸 싱네가 서있다. 제일 어린 마그다의 손을 잡고서, 그리고 요한네스는 싱네를 바라보며 벅찬 사랑을 느낀다, 그리고 싱네 곁에는 그의 다른 자식들 모두와 손자들과 이웃들과 사랑하는 지인들과 목사가 둘러서 있다. 목사는 흙을 조금 퍼올린다,


내가 읽어본 소설 중 가장 독특하고 새로운 느낌의 글이었다. 탄생과 죽음을 아침과 저녁이라고 표현하는 작품은 여럿 있지만, 감정과 생각을 폭풍처럼 쏟아지게 써내려가며 삶과 그에 대한 철학을 이야기하는 방식이 신기하게 느껴졌다. 해설에서도 언급된, 요한네스가 태어날 때 아버지인 올라이의 감정을 묘사하는 장면(그림 1)은 마치 자연의 모습과 올라이의 감정이 소용돌이치는 것 처럼 보인다. 전체적으로 소설이 이런 방식으로 쓰여진 것은 아닌데, 읽으면서 너무 신기하고 놀라워서 매우 흥미로웠다. 어떤 사람은 욘 포세의 <아침 그리고 저녁>이 소설보다는 서사시와 같다고 말하였는데, 나도 그런 느낌을 받았던 듯 하다.

그림 1. 욘 포세의 <아침 그리고 저녁> 19p

 

II에서는 요한네스의 시점으로 글이 쓰여지는데, 마치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노인의 모습으로 묘사된다. 나는 요한네스가 죽었거나(왜냐면 친구인 페테르가 "자네도 왔군" 이라고 말한다.), 혹은 치매로 인해 기억이 오락가락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만져지지 않는 친구와 동행하고, 홀로 돌아다니다가 젊은 아내나 나이든 친구를 만나기도 하고, 같은 말을 반복하고, 왜 내가 여기에 있지?하며 의아해하는 등의 묘사는 치매로 인해 스스로를 잃어가면서도 과거의 기억에 갇힌 노인을 묘사하는 듯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죽은 후 영혼이 되어 기억과 세상을 떠돌았던 것이었다. 먼저 세상을 떠났던 페테르는 이곳을 떠나면 죽은 가족과 친구를 만날 수 있는지, 그곳은 어떤지를 묻는다. 하지만 비바람이 불고 파도도 높으니까 그리고 페테르의 고깃배가 파도에 휩쓸려 올라갔다 떨어지더니 그들은 더이상 페테르의 고깃배가 아닌 다른 배에 앉아 바다 위를 떠 있다 그리고 하늘과 바다는 둘이 아닌 하나이고 바다와 구름과 바람이 하나이면서 모든 것, 빛과 물이 하나가 된다 그리고 거기, 에르나가 눈을 반짝이며 서 있다, 그녀의 눈에서 나오는 빛 역시 다른 모든 것과 같다, 그러고 나서 페테르가 더이상 보이지 않는다. 그래 이제 길에 접어들었네, 페테르가 말한다 그리고 페테르와 그는 그 자신이면서 동시에 아니기도 하다, 모든 것이 하나이며 서로 다르고, 하나이면서 정확히 바로, 그 자신이기도 하다, 저마다 다르면서 차이가 없고 모든 것이 고요하다 라고 표현된다. 고요하면서 잔잔하며 시처럼 읽히는, 쉼없이 마쳐지지 않는 긴 문장이 감정을 끌어낸다. 이 길고 쉼없는 하지만 중간중간 마쳐지고 다시 시작되는 문장들이 마치 인생같이 느껴진다는 생각도 들었다.

마지막에는 막내딸 싱네가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지 못하고, 아버지의 시체 앞에서 감정을 추스리며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장면도 나오고, 결국 산 자들의 세상을 떠나는 요한네스가 자신의 장레를 치르는 가족들과 싱네를 바라보며 떠나게 된다. 이러한 장면들은 요한네스의 시작과 끝, 그러니까 요한네스를 사랑하는 이들로 시작하여 요한네스를 사랑하는 이들로 마무리짓게 되어 더 감정을 요동치게 만든다고 느꼈다.

2023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작가라고 하여 독서모임에서 이 책을 골라 11월의 책으로 읽게 되었다. 초반에는 "내용이 예측 되는데?" 하고 읽기 시작했고, <오베라는 남자>가 떠오르기도 했지만, 다 읽은 후에는 글이 쓰여진 방식이나 감정을 끌어내는 방식들이 너무 좋아서 <오베라는 남자>와는 조금 결이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한 권의 시집같은 책이었고, 좋았다.

실은 초반에 요한네스의 어머니인 마르타에 대한 묘사로 가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 부분이 좀 불편하다고 느껴졌다. 했던 생각은 "어째서 남자 작가들은 어머니의 가슴에 집착하는가?"였다. 만국공통인가 싶었으나 전체적인 소설이 좋다보니 이런 불편함은 덮어졌다. 중후반에는 페테르가 정을 주었던 안나 페테르센이란 노처녀가 범해져서 임신을 했다는 이야기도 나오는데, 이 부분 또한 불편하게 느껴졌다. 정확히는 이 부분의 존재의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는데 기회가 된다면 이러한 부분에 대한 전문가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기도...

전자책으로 읽을지 종이책을 구매할지 고민했고, 초반(<오베라는 남자>를 떠올릴 쯤ㅋㅋ)에는 이거 다 읽으면 동네 작은도서관에 기부해야겠다! 했었다. 이 책을 지역 독립극장에서 영화티켓과 함께 묶음판매하는걸로 구매하였기에... 그런데 책을 다 읽고나니 내용이 너무 마음에 들고 좋아서 도저히!... 책을 소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 좋은 책이었고 오랜만에 책을 읽고 감정이 끓어 넘친다는 기분을 느껴서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