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8.08. ~ 2023.08.08. (1)
호
포션 1
정보라 저
읻다
2023년 6월 19일 출간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호러.공포소설
책소개
2022년 부커상 인터내셔널 최종 후보 선정작이었던 《저주토끼》의 작가 정보라의 미발표 데뷔작 《호》가 읻다 출판사의 장르문학 브랜드인 ‘포션’에서 출간되었다. 구미호 설화를 재해석한 작품으로, 2008년 디지털문학상 모바일 부문 우수상을 수상했던 작품이다.
로맨스 판타지, 호러 장르의 소설이다. 총 3개의 부에 20매 안팎의 짧은 장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야기의 진행이 빠르고 군더더기 없는 문장으로 이어진 웹소설의 문법을 가진 작품이다.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여우에게 홀린 한 남자의 이야기’라고만 간단히 말할 수 있지만, 구미호의 입장에서 보면 ‘한 남자를 사랑한 끝나지 않는 여우의 사랑 이야기’라고도 볼 수 있다.
《호》가 특별한 건 ‘남자’가 ‘여자’의 정체가 구미호임을 알면서도 사랑했다는 것이고, ‘여우’ 또한 과거에 인간 남자에게 배신당했음에도 다시 한 남자를 사랑하기로 마음먹었다는 것이다. ‘남자’는 사랑을 위해 자신의 목숨마저 내놓는다. ‘여우’는 사랑을 위해 남자 앞에 몇 번이고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소설의 말미에 나오는 문장처럼, 《호》는 사랑이란 정말 알 수 없다는 말을, 인연이란 정말 알 수 없다는 말을, 로맨스와 호러를 잘 반죽해서 만든 긴 이야기로 풀어낸다.
한국 요괴의 이야기
공포 소재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가장 먼저 떠오를 것은 귀신일 것이다. 그다음은 아마도 좀비나 뱀파이어일 것이다. 그다음부터는 사람마다 다르겠지. 무자비한 사이코패스 살인마를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늑대인간이나 외계인, 생명과학으로부터 탄생한 괴생명체 같은 것들을 말할 것이다. 또는 구미호나 이무기와 같은 한국 고전설화의 주인공격인 한국 요괴들을 언급할 것이다.
한국은 전통문물을 경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도 (드라마, 영화보다는...)소설이나 만화는 접근이 쉬우니 무당이 주인공이거나, 불교 관련 소재, 구미호나 이무기와 같은 한국 요괴들을 이용한 작품이 좀 있었다. 2000년대 당시에 공포영화 붐이 있었는데, 이때는 대부분 사람 간의 분노와 저주를 소재로 한 것들이 많았다. 유명한 작품들을 떠올리자면 <장화, 홍련>, <알포인트>, <여고괴담 시리즈> 정도가 있지 않을까? 이런 작품들은 한국 그 자체를 보여준다고 할 수는 있지만 구미호나 이무기 같은 게 등장하진 않는다. 되려 <곡성>이나 <사바하> 혹은 <제 8일의 밤> 같은 작품들이 한국 요괴, 수호신, 불교와 관련된 소재 들로 이야기한다.
해외로부터 유입된 공포 소재들은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신기하고 흥미롭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고 찾는다. 단순히 공포가 아니더라도 게임, 마라톤, 예능 등으로 소비한다. 그래서인지 이러한 공포 소재들의 공포도는 과거보다 많이 낮아졌다. 접근허들을 낮춰주는 작품 들 을 말하자면, 귀신-한을 풀어준다는 기 약한 남자에 대한 코미디 영화(차태현 주연의 <헬로우 고스트>, 2010), 뱀파이어-잘생긴 뱀파이어와 오래된 주택에서 동거를 하게 된다는 로맨스 코미디 드라마(옥택연 주연의 <가슴이 뛴다>, 2023), 좀비-좀비가 퍼진 서울이라는 설정 하에 펼쳐지는 서바이벌 예능(이시영, 박나래 등이 출연하는 Netflix 예능 <좀비버스>, 2023) 등이 있다. 고작 남자 하나 홀려 간을 빼먹는 구미호보다는 이성을 잃고 달려들어 수백, 수천의 사람을 죽이고 감염시키는 좀비가 더 재미있을 시대니까.
(아, 나는 이래서 영화얘기를 하면 안 된다. 구구절절 말이 많아진다...)
구미호라는 요괴는 <내 여자친구는 구미호>라던가 <구미호뎐>과 같은 작품들을 통해 대중에게 '친근'하고 '예쁜' 이미지가 된 것 같다. 옛날이라면 예쁘장한 미모로 멀쩡한 남의 집 귀한 아들을 홀려 간만 홀라당 빼먹고 떠난다는 무서운 상상의 동물이었겠지만, 앞서 언급한, 그리고 언급되지 않았지만 그와 관련된 작품들로 인해 이미지가 많이 바뀐 것 같다.
나는 정보라 작가님을 매우 좋아하는데, "이런 소설"을 출판해 주셔서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 나는 이런 소재를 정말 정말 좋아하니까. 워낙 재미있는 스토리를 짜내시기도 하지만, 더불어 글이 매우 쉽게 읽히기도 한다. 그리고 이 쉽게 읽히고 재미있는 글이 단순하지만은 않아서 책을 읽은 후 복잡한 마음이 들어 여러 생각을 하게 하기도 한다. <저주토끼>에서도 그랬고, <호> 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무엇을 하든, 그는 무작정 넋을 잃고 보고 있었다.
"저기, 또 만날 수 있어요? 여기, ...또 와도 돼요?"
그녀는 살짝 미소 지었다.
"올 수 있으면 와봐요."
그리고 그녀는 나가버렸다.
그 후로 오랫동안 그녀에게서 연락이 없었다. 사실은 '오랫동안'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녀를 만나지 못하는 하루하루가 너무 길어서 '오랫동안'이라고 느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미 여우에게 홀려 있었던 데다가, 생사를 오가는 큰 사건도 한 번 겪었기 때문에, 말하자면 당신은 이승과 저승의 중간 지대로 점점 밀려나서, 거기다 구멍을 뚫어버린 겁니다. 그리고 이후로도 여우와 계속 접촉하면서 산사람으로서의 기를 뺏겨서, 온몸으로 이승과 저승을 잇는 다리 역할을 하게 됐다는 게 나의 분석입니다."
그 재봉틀은 음기로 가는 재봉틀이야. 양기가 닿으면 바늘이 녹는단 말이야.
사고가 일어나 다들 죽어나가는 와중에 살아있는 기준이 신기했으려나. 지은은 기준에게 '하이-샤인 립 트리트먼트 14호'를 쥐어준다. 그걸 시작으로 기준은 지은에게 말을 건네보지만, 지은은 자신에게 관심을 갖는 기준을 무시하려 한다. 처음엔 정기나 뽑아먹어 보려는 마음이 아니었을까? 지은이 만약 구미호가 아니었다면 어땠을까? 자신에게 질척대는 남자가 그리 마음에 안 들고 짜증 나지만은 않으니, 데이트나 한 번 하고, 섹스나 한 번 해보자는 가벼운 마음가짐이 아니었을까?
남자가 여자에게 푹 빠지는 사이에 여자는 여러 고민을 할게 분명하다. 사람들은 그렇게 말하고들 하니까. 첫눈에 반하게 된다면, 운이 좋아 커플이 성사되거나 운이 나빠 이도저도 아닌 사이가 된다. 지은과 기준이 그런 사이였던 것 같다. 구미호인 지은은 어차피 너도 똑같은 인간이고, 너에게 구미호인 나도 이럴 것이고, 내가 지금까지 겪어본 '인간'들은 다 똑같았으니. 기준이 백지가 되었을 명함에서 지은의 정보를 읽어낸 건 인간의 간절함을 통해 만들어낸 기적과도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더 그랬을 거다. 카톡 보내는 거 무시하고 무시하다가, 기준의 간절함을 느끼고 지은이 그래요, 밥이나 먹어요. 했을지도.
기준이 사랑에 눈이 멀어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고 그저 지은과 보낸 시간이 행복하고 지은을 보고 싶고 그러며 시간을 보내는 것이, 오로지 기준의 탓인 것인데, 할머니는 지은이 여우라서, 여우가 기준을 홀려서 그런 것이라고 한다. 네가 지금 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야! 넌 여우에게 홀린 거지! 그렇게 말하는 할머니에게, 이게 사랑이라고 말하는 기준을 볼 때마다 기분이 이상했다. 이야기를 처음부터 읽은 나는, 지은이 기준을 홀린 게 아니란 걸 아니까. 그렇지만 물론 구미호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냥 자동으로! 기준을 홀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할머니는 안된다고, 사냥개를 둬야 한다며, 그것까지 불러서...
왜 연인관계에서는 항상 여자가 여우고 꽃뱀일까? 작가님은 이런 생각을 끌어내고자 이 글을 쓰셨던걸까? 혼자 즐겁게 그런 생각을 했다. 구구절절 트위터에 길게 내 생각을 적었다. 왜 항상 여자만 여우고 여자만 꽃뱀일까? 정말 사랑하는 걸 수도 있을 텐데. 기준이가 정말 지은에게 푹 빠져서 간이고 쓸개고 다 빼줄 수 있는 상태가 된 걸텐데. 그만큼 지은이 아름답고, 매력적인 사람이었던걸수도 있을텐데. 꼬리 아홉 달린 구미호라는 것은 사실 내 아들을 뺐어간 년 같은 게 아니었을까. 내 소중한 손주, 아직 크게 되지는 못했지만, 곧 크게 될 아이. 그 애를 홀려서 일도 가족도 챙기지 않게 하고! 그냥 사랑에만 눈이 멀어 하루가 가는지 한 달이 가는지도 모르게 하는 망할 년!... 뭐 그런 게 아니었을까 싶다. 세상엔 정말 돈만 밝히고 남자를 꼬셔내는 꽃뱀이 있을지도 모르고, 남자 등골 빼먹으려는 여우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항상 모든 여자가 여우 혹은 꽃뱀이 되니까 말이다. 어쨌거나, 나는 기준과 지은을 보며 이런 생각을 했었다.
그래서 나는 기준이 마지막이, 슬픔에 젖은 지은의 마지막이 슬펐다.
현실을 읽게 함과 동시에 판타지로 마무리하여 마음속 깊은 곳에 지은과 기준의 이야기가 자리를 잡게 되었다.
정말 정말 재미있는 글이었다.
*이 책은 2023 국제도서전 첫날에 구입했는데, 운 좋게도 이날 정보라 작가님을 직접 만나게 되어 팬이라고 이야기를 전하며 책에 싸인을 받을 수 있었다! 정말정말 소중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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