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2.27. ~ 2024.12.28. (2)
왜 어떤 정치인은 다른 정치인보다 위험한가
제임스 길리건 저
이희재 역
교양인 출판
2023년 05월 22일 출간
사회과학 > 비평/칼럼 > 정치비평/칼럼
“우리가 어느 쪽에 투표하는지에 삶과 죽음이 달렸다.”
“보수가 집권하면 언제나 사람들이 더 많이 죽는다.”
한 세기에 걸친 폭력적 죽음을 둘러싼 수수께끼를 풀다
수십 년간 폭력 문제를 연구해 온 정신의학자가 어느 날 통계를 분석하다 기묘한 수수께끼에 부딪혔다. 그가 분석한 자료는 1900년부터 2007년까지 미국의 자살률과 살인율 통계였다. 한 세기 동안 일관되게 자살률과 살인율이 동시에 높이 솟구쳤다가 동시에 급격하게 떨어졌던 것이다. 대체 왜 자살률과 살인율이 같이 움직이는 걸까? 슬프거나 ‘미쳐서’ 자살하는 사람과 범죄적 동기로 남을 해치는 살인자가 어째서 동시에 확 늘었다가 확 줄어드는 걸까?
이 수수께끼에 도전한 사람은 바로 미국의 정신의학자 제임스 길리건이다. 그는 지난 한 세기 동안 눈에 뻔히 보이는 곳에 숨어 있었던 충격적인 사실을 발견했다. 보수 정당, 즉 공화당 출신이 대통령이 될 때마다 온 나라가 자살과 살인이라는 ‘치명적 전염성 폭력’으로 고통받는다는 것이다. 그는 지난 100년간 미국의 인구 변화와 실업, 불황, 불평등 같은 경제적 · 사회적 변수의 상관 관계를 보여주는 각종 통계와 기존 연구 성과를 분석했다. 그 결과 집권 정당과 자살률 · 살인율 사이에 명백한 인과 관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이 책은 2012년에 출간된 『왜 어떤 정치인은 다른 정치인보다 해로운가』, 2015년에 출간된 『위험한 정치인』의 개정판입니다.
미국 전체의 폭력 치사가 공화당 대통령의 취임 직후부터 늘기 시작해서 임기 말년쯤에 최고점에 도달하였다. 그런데 민주당 대통령이 취임하면 폭력 치사가 줄기 시작해서 임기 말년쯤에 최저점에 도달하였다. 1900년 당시 미국에서 살인율과 자살률을 합한 폭력 치사 발생률은 인구 10만 명당 15.6명이었다. 그때부터 2007년까지, 한 세기가 넘는 기간에 공화당 대통령들이 총 59년을 집권했는데 공화당 집권 기간을 통틀어 1900년과 비교해서 폭력 치사 발생률의 순누적 증가분이 19.9명으로 나타났다. 민주당 대통령들이 집권한 48년 동안에는 폭력 치사 발생률의 순누적 감소분이 18.3명으로 나타났다. 같은 내용을 다른 식으로 표현하면, 두 정당이 집권했을 때의 폭력 치사로 인한 사망률은 민주당 때가 공화당 때보다 10만 명당 38.2명 적었다. “오늘날 미국 인구 수준으로 나타내자면 이 수치는 민주당 정부 때 공화당 정부 때보다 폭력 치사로 죽는 사람이 약 11만 4,600명 적음을 뜻한다.” 공화당 대통령 집권기에는 살인과 자살이 훨씬 더 많이 일어났고, 민주당 대통령 집권기에는 살인과 자살이 훨씬 덜 발생했던 것이다.
아내와 아이들을 죽이도록 폴을 몰아간 것은 실직 그 자체가 아니었다. 왜 사람이 그 모양이냐는 아내의 비난에 대한 답으로 아내에게 총을 쏘도록 폴을 몰아간 것은 남자로서 자존심을 잃었다는 느낌, 아내의 눈에 자기가 남자 노릇을 못하는 존재로 비친다는 사실에서 느낀 수치심이었다. 아이들을 죽인 것도 아이들이 내지르는 비명에 그 아이들이 목격한 자신의 수치스러운 모습이 담겨 있어서였다.
심각한 폭력 범죄에 관여하는 남자의 비율에서 흑인과 백인의 차이를 비교하면 11세 때만 하더라도 거의 같은데 청소년 시기의 후반으로 가면 흑백 비율이 3대 2가 되고 이십대 후반에는 거의 4대 1로 격차가 벌어진다. 하지만 엘리엇이직장이 있는 흑인 남자와 백인 남자를 비교했을 때 21세까지는 두 집단이 보이는 폭력 양상에서 의미심장한 차이가 없었다. …… 결국 폭력 행동의 인종별 차이를 만들어내는 주된 원인은 …… 실업이다.
소득 불평등 수준이 높은 인구 집단에서 살인율은 상대적으로 가난한 자들 사이에서만 올라가는가, 아니면 부유한 자들 사이에서만 올라가는가, 아니면 가난한 자와 부유한 자들에게서 모두 올라가는가? 그리고 만일 일차적으로 가난한 자들 때문에 살인율이 올라간다면 가난이 그들의 살인 행동을 유발하는 것인가, 아니면 가난을 유발하는 성격 때문에, 즉 화를 잘 낸다든가 성질이 포악하다든가 어울리기 불편한 성격이라 툭 하면 잘리고 아무도 그를 고용하기를 원치 않아 살인을 더 쉽게 저지르고 마는 것인가?
1957년부터 1990년까지 미국에 대한 시계열 분석(time-series analysis)을 통해서 경제 불평등이 커지면(흑인이나 백인 모두) 살인율이 높아짐을 발견했다. 다시 말해서 경제 사정이 갑자기 달라지기전까지는 모든 기간 동안 살인을 저지르지 않았던 똑같은 인구 집단이 불경기가 시작되어 수백만 명이 직장해서 해고된다음에만 살인을 저지르기 시작했다(개개인의 성격 특성이나 하던 일의 질하고는 무관했다).
나는 공화당 열성 지지자들로부터 높은 소득세, 높은 자본이득세, 높은 법인세, 높은 ‘사망’(상속)세와 과도한 규제로 경제 성장을 질식시키는 경쟁자 민주당과는 달리 자기네 정당은 경제를 성장시키는 정당이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서 정말 그런 줄로만 알았고, 민주당은 경제에 약하고 공화당은 경제에 강하다는 사실을 상쇄할 만큼 다른 공적 사안에서 여러모로 나라에 좋은 이익을 가져올 것이라고 생각될 때만 민주당을 지지해야 하는 줄 알았다. 그래서 공화당의 평판과는 달리 숫자가 보여주는 것은 정반대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정말로 놀랐다. 충격을 받았다는 말이 더 정확할 것이다. 내가 여기서 언급한 숫자는 진보 성향이나 좌파 성향과는 거리가 먼 전미경제연구소가 수집하고 공표한 것이다.
공화당은 자기 정권 때 시작된 불황을 다음 정권에 ‘유산’으로 넘길 확률이 민주당보다 4배나 높았다. 공화당은 모두 4번에 걸쳐서 곧 민주당의 윌슨, 프랭클린 루스벨트, 케네디, 버락 오바마(Barack Obama) 대통령에게 불황을 물려준 반면 민주당은 딱 한 번만 그랬다(1921년 3월 윌슨 정부 때 시작된 불황).
힙스에 따르면 “(1951년) 이후 일어난 여섯 번의 불황 중에서 다섯 번이 …… 공화당 정부 때 일어났다. 이 경기 위축은 하나같이 …… 인플레이션과 싸우느라 의도적으로 만들었거나 수동적으로 받아들인 것이었다.” 그런데도 1948년부터 2005년까지 공화당 정부 때의 물가 상승률이 민주당 정부 때 나타난 물가 상승률과 사실상 차이가 없다는 것은 잔인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3.76퍼센트 대 3.97퍼센트). 반면 전체 성장 규모를 비교하면(연간 1인당 실질 국민총생산 기준) 바텔스가 보여준 대로11) 민주당 때가 공화당 때보다 70퍼센트나 높았다(2.78퍼센트 대 1.64퍼센트). 이렇게 공화당은 표면적으로는 인플레이션을 막는다면서 실업, 불황, 불평등을 높이는 경제 정책을 추구했지만 실제로는 인플레이션을 막는 능력이 민주당보다 별로 뛰어나지도 않았다.
그래도 중요한 수수께끼는 여전히 풀리지 않았다. 어째서 미국 국민은 자신을 불평등(상대적 빈곤)과 폭력이 늘어나는 세상으로 자꾸만 몰아가는 대통령을 낳는 정당에 표를 던지는 것일까? 또 하나, 어째서 그 정당과 그 정당이 배출한 대통령은 불평등과 폭력을 키우는 정책을 계속해서 추구하는 것일까? 나도 놀랐고 독자도 놀라겠지만 이 두 가지 물음은 한 가지 대답으로 답할 수 있다. 그 답을 알아내기 전에 우리는 세 번째 질문을 던져야 한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어째서 유권자의 99퍼센트가 전체 인구의 1퍼센트에게 나라 전체 재산의 40퍼센트 이상을 몰아주는 것일까?
20세기에 미국의 부가 가장 편중된 시기 중 첫 번째는 대공황이 일어날 때까지 공화당이 정권을 잡은 1920년대였고 두 번째는 196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까지(특히 1980년대의 레이건 집권기)였다. ‘광란의 20년대’에 공화당이 이루어놓은 부의 양극화를 뒤집은 것은 1933년부터 1960년대 후반까지 이어진 뉴딜 합의였다. 이것은 어려운 사람에게 처음으로 지급된 소득 보조금(사회 보장비, 실업 수당 등), 실업 감소, ‘최저 임금’과 병행하여 최고 소득세를 90퍼센트까지 끌어올려 부가 소수에게 집중되는 것을 막은 사실상의 ‘최고 임금’ 제도 도입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이런 제도들을 비롯한 다양한 정책은 일부 경제사학자들이 소득과 재산의 격차가 크게 줄어들었다는 데서 ‘대압착(Great Compression)’이라고 부르는 결과를 낳았다. 대략 1940년부터 1970년에 이르기까지 미국은 가장 번영했을 뿐 아니라 경제적으로 가장 평등하고 가장 비폭력적인(적어도 나라 안에서 벌어진 폭력만 보자면) 시대를 누렸다. 하지만 1969년에 공화당이 정권을 되찾자 평등의 시대는 끝나고 레이건 시대에 와서는 재산과 소득의 불평등이 1920년대 수준으로 되돌아갔다(폭력 치사 발생률 역시 그때 수준으로 다시 높아졌다). 불평등이 심화하는 속도는 1990년대의 클린턴 정부 때 주춤해서 전임 공화당 대통령들 때에 비해 겨우 3분의 1 수준으로 떨어졌다. 클린턴이 실업률과 실업 기간을 줄이고 최고 소득세율, 근로 장려세(직업이 있지만 소득이 낮은 사람에게 돈을 주는 마이너스 소득세), 평균 임금, 최저 임금을 끌어올리고 국민 전체의 재산과 소득 중 적어도 일부를 부유한 자한테서 가난한 자에게로 재분배하는 효과를 낳는 정책을 성공적으로 도입한 덕분이었다. 그렇지만 사회를 불평등한 쪽으로 밀어가는 힘은 여전히 강해서 1998년 즈음에도 미국의 최상류층 1퍼센트가 여전히 전체 부동산 자산의 38퍼센트와 전체 금융 자산의 47퍼센트를 차지했다. 다시 말해서 가장 잘사는 1퍼센트가 나라 부동산의 거의 40퍼센트를 소유하고 돈과 기타 유동 자산(주식, 채권 등)의 거의 절반을 소유한 것이다.
공화당이 내놓은 해법은 중하류층과 극빈층을 이간질해서 내 지갑을 얇게 만드는 주범이 상류층(과 상류층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당)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초점을 흐리는 것이었다.
존슨에 따르면 상류층 백인에게는 남부에서 인종 차별이 지속되는 것이 정치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유리했다. 그래야만 못사는 백인이 더 못사는 흑인 집단을 깔보면서 우월감을 느낄 수 있고, 그렇게 우월감을 느껴야만 훨씬 재산이 많고 잘사는 백인에게 질투나 앙심을 품지 않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를 자처하는 정치 체제에서도 소수의 부자가 이런 ‘분할 정복’ 전략으로 절대 다수의 가난한 사람들을 지배하고 수탈함을 보여주는 좋은 예다.
여기서 충돌하는 이익이 또 하나 있으니 바로정치적 이익이다. 폭력 범죄율이 올라가면 중산층이 저소득층한테 느끼는 거부감과 저소득층이 같은 저소득층한테 느끼는 거부감, 다시 말해서 폭력을 휘두르지 않는 다수가 폭력을 휘두르는 소수를 자신에게 가장 직접적인 위협을 가할 수 있는 존재라고 느끼는 데서 오는 거부감도 커지므로 유권자를 분할 정복하기가 쉬워져서 아주 잘사는 사람에게는 유리하다. 그런 일이 벌어지면 중산층은(못사는 사람을 폭력적이고 위험한 집단으로 보기에) 못사는 사람의 이익을 지켜주는 정당을 찍으려는 마음이 줄어들고 못사는 사람도(처벌을 강화하면 폭력 범죄율이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 줄어든다는 잘못된 믿음으로 말미암아) 범죄자에게 덜 엄격한 정당을 찍으려는 마음이 줄어든다. 빈곤도 폭력도 쉽게 식별이 가는 인종 집단과 민족 집단에 집중되므로 공화당은 주류 인종 집단과 주류 민족 집단에 속하면서 소수 집단으로부터 위협을 느끼는 빈민층과 중하류층 유권자들이 품은 두려움을 우려먹을 수 있다.
범죄율과 폭력 발생률이 높아질수록 중산층과 저소득층은 서로를 증오하도록 농락당하며 자기 주머니를 진짜 털어 가는 사람은 자신들 가운데 있는 비교적 소수인 무장 강도가 아니라 더 소수인 아주 잘사는 사람들과 그들을 대변하면서 돈을 저소득층과 중산층의 손에서 최상류층의 손으로 옮기는 공화당 정치인임을 깨닫기 어려워진다. 가난한 사람은 총을 들고 강도질을 하지만 부자는 펜을 들고 강도질을 한다는 옛말이 딱 들어맞는다.
찰스 슈머(Charles Schumer) 상원의원은 공화당의 전략을 이렇게 규정한다. “공화당은 범죄자가 많아지기를 바란다. 공화당은 인종 문제로 분열될 때만 이긴다. …… 낙태나 동성애 같은 인종 아닌 문제로 이기려 들면 번번이 진다. 공화당이 범죄를 물고 늘어지는 건 그래서다. …… 그러면 이긴다. 공화당은 그걸 안다.”
나는 결핵균이 결핵 발병의 필요 조건이지만 충분 조건은 아니듯이 폭력 행위를 낳는 으뜸 가는 원인을 수치심으로 지목하면서 수치심은 폭력 행위를 낳는 데 충분하지는 않아도 꼭 필요한 병원체라고 말했다. 수치심은 이런저런 이유로 누구나 느끼지만(결핵을 ‘일으키는’ 미생물에 노출되어도 대부분의 사람은 결핵에 걸리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대부분의 사람은 심각한 폭력 행위를 저지르지 않는다. 따라서 기질, 문화, 사회 계급, 나이, 성별 등 폭력 행위를 결정하는 그밖의 다른 요인들이 많은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폭력이 발생할 때는 수치심과 굴욕스런 경험, 또는 이런 경험을 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반드시 작용한다.
정신역학으로 보았을 때, 수치심은 ‘자기 앞가림’을 할 줄 아는 능동적이고 자립적이고 주체적이고 독립적인 성인과는 정반대로 남에게 사랑과 보살핌을 받고 싶어 하는 수동적이고 의존적이고 유치하고(남자들 눈에는) 사실상 ‘여자 같은’ 것으로 보일 수 있는 부끄러운 소망을 억누르는 동기로 작용한다. 수치를 느낄 줄 아는 능력은 만일 그것이 포부와 성장과 발전과 성취를, 실력과 지식의 습득을, 그리고 자립의 또 다른 필수 조건인 자존감과 남들로부터 존경을 얻는 힘을 키워주는 동기로 작용한다면 사람이 성숙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러나 문제는 하나부터 열까지 의존적으로만 살아가는 사람도, 하나부터 열까지 독립적으로만 살아가는 사람도 이 세상에는 없다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늘 상호 의존적이다. 남들로부터 도움과 지원을 받아야 하는 자신의 상황을 사람이라면 누구나 맞닥뜨리게 마련인 인간 조건(나는 환자에게 가끔 “얻을 수 있는 도움은 최대한 얻는 것이 좋다.”고 말한다)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내가 못나고 약한 증거라고 잘못 규정하는 사람은 지원을 받아야 하는 자신의 처지를, 사기와 조작으로 부당하게 많은 복지 수당을 받으면서 놀고 먹는다는 이른바 ‘복지 여왕’에게 투사하여 모욕하고 부정하고 질책한다. 수치심은 그런 식으로 우파적인 정치·경제적 태도와 가치관을 자극할 수 있다. 수치심에 휘둘리는 사람에게 ‘복지’에 기대는 ‘의존성’은 동정의 여지가 없으며 부끄러워해야 하고 꾸짖어야 하고 내몰아야 하고 질타해야 하는 아주 몹쓸 짓이다.
죄의식의 윤리로 살아가는 사람은 자부심을 누르고 겸손을 품는 길의 하나로 사회적 신분이 낮은 사람들에게 동질감을 느끼려 하고, 반대로 수치심의 윤리로 살아가는 사람은 자부심을 끌어올리고 자신의 수치심과 열등감을 누그러뜨리는 길의 하나로 사회·경제적으로 우월한 신분에 있는 사람에게 동질감을 느끼려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좀 더 쉬운 말로 표현하면 죄의식의 윤리로 살아가는 사람은 약자에게 동질감을 느끼는 성향이 강하고 수치심의 윤리에 젖은 사람은 강자(‘초인’을 앞세우면서 예수의 ‘노예 윤리’에 맞서 ‘주인 윤리’를 역설한 니체도 수치심의 윤리를 부르짖으면서 후기 저작에서 자신은 ‘적그리스도’라고 밝혔다)에게 동질감을 느끼는 성향이 강하다.
미국 남부에서 수치와 정치의 상호관계는 앞에서 언급했지만 린든 존슨이 거론한 ‘버본 전략’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존슨에 따르면 남부에서 인종 차별이 지속되는 것이 버본(백인 지배층)에게는 정치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유리하다. 그래야 가난한 백인이 자기보다 더 가난한 흑인을 깔보고 우월감을 느낄 수 있어서다.
실제로 현재 남부에서 나타나는 인종 차별의 역사적 선행물이라 할 수 있는 노예제 역시 엇비슷한 맥락에서 볼 수가 있는데,10) 노예제는 노예를 소유한 사람에게 주인이라는 명예를 안겨주었고 열등한 종자(흑인 노예)와 노예를 못 가진 백인(들판에서 일하느라 햇볕에 탔다고 해서 ‘벌건목’이라든가 ‘깡통’이라든가 ‘흰쓰레기’로 불리면서 멸시당했다)에게 노예를 소유한 사람의 우월함을 각인하는 역할을 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의) 현대 일본처럼 ‘온건한’ 수치 문화라고 부르면 좋을 사회에서는 수치로 말미암아 얼마나 심한 파괴와 폭력이 불거지는지를(그리 멀지 않은 일본의 과거사도 보여주듯이) 헤아리고 본의가 아니었는데도 혹시라도 사람들이 수치를 느끼는 일이 안 생기도록 예의범절을 발전시켰다. 미국 남부 같은 사회는 좀 더 ‘극단적인’ 수치 문화라고 부를 수 있겠는데, 이런 사회에서는 남을 괄시하거나 남에게 괄시당하는 것을 피하는 수단으로 엄격한 법도를 따르도록 사람들에게 기대한다.
권위주의적 인격은 사람을 우월한 존재와 열등한 존재로 나누어야 한다고 믿을 뿐 아니라 자기가 속한 인구 집단이 더 우월하다고도 믿는다. 예를 들어 백인이 유색인보다 우월하다고, 부유한 자가 가난한 자보다 우월하다고, 연장자가 연소자보다 우월하다고, 남자가 여자보다 우월하다고 믿는다. 그런 고정관념이 사람들에게 잘 먹혀든다는 것은 1968년 이후로 공화당이 부유하고 나이 든 백인 남성의 표를 쓸어담았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권위주의 연구는 방법론에서 점점 정교해졌는데, 그러면서 더 분명해진 한 가지 사실은 권위주의가 우파의 정치적 태도 및 가치관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우파 권위주의라는 말은 사실 동어반복이다. 이탈리아의 정치학자 노르베르토 보비오(Norberto Bobbio)가 《제3의 길은 가능한가 : 좌파냐 우파냐》 에서 지적한 대로 우파 정치 운동은 사회적 불평등과 신분 질서를 긍정적으로 보며 좌파 정치 이념은 사회·경제적 평등을 추구하는 데 무게 중심을 둔다. 그래서 우파 정치는 권위주의적 인격의 가치관에 딱 들어맞는다. 권위주의의 공격성 선호는, 다시 말해서 정부 당국의 물리력 행사를 권위주의가 지지한다는 것은 적색 주에서 극형과 투옥이 남용된다는 데에서도 알 수 있다.
이미 확실하게 끌리는 당이 있거나 ‘자기’ 당을 보고 후보를 찍는 유권자 말고 자신을 ‘무당파’라고 생각하는 유권자가 특히 그렇다. 그렇지만 많은 선거의 결과를 좌우하는 것은 이런 무당파 부동층 유권자와 주로 이 당 후보를 찍다가도 가끔은 저 당 후보를 찍는 유권자들이다. 그래서 나는 1900년부터 2007년까지 나온 12명의 공화당 대통령과 7명의 민주당 대통령의 인격 차이가 아무리 크다 하더라도 폭력 치사에 끼친 영향을 훨씬 분명하게 예측하는 것은 대통령 개개인한테서 나타난 그 어떤 차이보다도 대통령의 출신 정당이었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유권자들이 대통령 후보에게 표를 던질 때는 개인이 아니라 사실은 그가 속한 정당을 찍는 것임을, 좋든 싫든 그 정당과 결부된 모든 이념을 보고 투표를 하는 것임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책을 읽으면서 정말 많은 정보값을 얻었다. 나는 사실 정치에 관심이 별로 없는 사람이고, 정치인을 잘 뽑아놓으면 내가 관심을 크게 갖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그레이존의 사람이었달까. 그러다가 정치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이 박근혜때였다. 그래도 잘 몰랐던 이유는... 알아야 하는 정치인들과 그들의 정당이나 그들이 어떤 성향인지 등을 알기가 너무 어렵고 어떤 히스토리를 가지고 있는지도 어려웠기 때문이다. 사실 티비를 보면 될 일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신문이나 티비를 믿을 수 없었던 이유는 그런 언론들도 이미 한 쪽으로 편향되어있었기 때문이다. 조중동같은 큰 언론사를 믿고 가자니 특정 정당을 지지하거나 특정 정치인을 지지하는 성향이 너무 노골적으로 드러났고, 방송사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그 외에 다양한 신문사들이 마찬가지로 있고, 내가 고등학생~대학생 때는 팟케스트도 많이 나와서 내가 정확한 정치성향이 있다면 그것에 맞춰 골라서 보면 될 일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나는 내 정치성향도 잘 몰랐다는 것...
뭐, 이제 이런 어른이 되어... 이명박근혜 시절을 지나 문재인, 윤석열을 거치며 다양한 정치개판을 경험했는데. 나의 짧은 정치공부에 있어서 가장 파격적인 공부의지를 부여해준 것이 이번 윤석열 정부인 것 같다. 책을 본격적으로 읽게 되면서 정치와 관련된 책들을 많이 읽었다. 해외에서 보수나 진보와 관련된 책들을 찾아 읽거나 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그런데 윤석열의 비상 계엄 선포와 해제를 겪으면서 충격을 금치 못했다. 그러다가 골라 읽은 것이 이 책이다.
우연찮게 이 책을 골라잡았는데, 정말 많은 문장들이 나를 충격에 빠뜨렸다. 예를 든다면, 미국 전체의 폭력 치사가 공화당 대통령의 취임 직후부터 늘기 시작해서 임기 말년쯤에 최고점에 도달하였다. 그런데 민주당 대통령이 취임하면 폭력 치사가 줄기 시작해서 임기 말년쯤에 최저점에 도달하였다. 와 같은 문장이다. 나는 이런 정보값에 대해서는 전혀 연관성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경제 성장에 대해서는 관련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말이다. 결국 경제 성장과 고용안정 등이 사람들의 삶에 안정을 주고 편견과 혐오가 줄어들며 폭력치사나 자살율에 관련된다는 말이다. 이런 부분에 대해서는 정말 쉽게 연관지을 수 있음에도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부분이었다. 우리 사회에 분명히 존재하는 사회적 약자들을 외면해왔던 꼴이라는 생각이 들어 스스로 반성했다.
책 중간에 나오는 정치경제에 의한 가정의 붕괴(아내와 아이들을 죽이도록 폴을 몰아간 것은 실직 그 자체가 아니었다. 왜 사람이 그 모양이냐는 아내의 비난에 대한 답으로 아내에게 총을 쏘도록 폴을 몰아간 것은 남자로서 자존심을 잃었다는 느낌, 아내의 눈에 자기가 남자 노릇을 못하는 존재로 비친다는 사실에서 느낀 수치심이었다. 아이들을 죽인 것도 아이들이 내지르는 비명에 그 아이들이 목격한 자신의 수치스러운 모습이 담겨 있어서였다. )에 대한 이야기도, 사실 처음에는 동의하지 못했다. 이건 각 인간들의 본성과 사회성에 크게 연관되었다고 생각했다. 어떤 당이 집권하느냐에 따라 달라질게 아니라, 애초에 그 사람은 꾸준히 관리를 받거나 사회적으로 보호를 받아야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결국 경제가 무너지고, 개인의 자신감 하락과 존재성 상실 이후에 자아가 붕괴되면서 발생하는 부가적인 상황들을 개인이 어떻게 대처하느냐의 차이로 생각한 것이다. 음 이런걸 보면 나는 T가 맞는거같애... 그래도 나는 이게 미국의 기초교육의 실패라고 느껴졌었다. 어떤 정당이 집권하느냐에 따라 고작 10년도 안되는 기간동안 한 사람이 자신의 성향을 참아내고 참아내지 못하느냐가 갈린다면, 그건 기초교육의 실패가 아니겠는가? 그런데 이 이야기는 뒤에서 수치심과 관련되어 한 번 더 언급되었다. 나는 결핵균이 결핵 발병의 필요 조건이지만 충분 조건은 아니듯이 폭력 행위를 낳는 으뜸 가는 원인을 수치심으로 지목하면서 수치심은 폭력 행위를 낳는 데 충분하지는 않아도 꼭 필요한 병원체라고 말했다. 수치심은 이런저런 이유로 누구나 느끼지만(결핵을 ‘일으키는’ 미생물에 노출되어도 대부분의 사람은 결핵에 걸리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대부분의 사람은 심각한 폭력 행위를 저지르지 않는다. 따라서 기질, 문화, 사회 계급, 나이, 성별 등 폭력 행위를 결정하는 그밖의 다른 요인들이 많은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폭력이 발생할 때는 수치심과 굴욕스런 경험, 또는 이런 경험을 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반드시 작용한다. 라고 언급한다. 이런걸 생각하면 ... 집권 정당이 문제되는게 맞는 것 같다. 쩝...
부자들은 더 부자가 되고 싶어하고, 가난한 자들은 부자들을 동경하거나 자신도 부자들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한다. 결국 공화당이 집권할 때는 가진 사람이 더 크게 갖고, 복지가 줄어든다.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공화당이 내놓은 해법은 중하류층과 극빈층을 이간질해서 내 지갑을 얇게 만드는 주범이 상류층(과 상류층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당)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초점을 흐리는 것이었다. 라고. 이런 이야기가 있다. 또 다른 공격당할 약자가 존재하기 때문에 미국은 페미니스트가 그리 공격당하지 않는다는 이야기. 이런 이야기를 예전에 트위터 어디에선가 본 적이 있다. 어쨌거나 결국은 이간질에 의해 시민들은 너무나 쉽게 흔들리고, 자신이 가진자라고 생각하며 위치를 망각하거나 철저히 사람들간에 선을 그어버리는 것이 문제인 것 같다. 이렇게 생각하면 역시 기초교육의 실패가 맞는... 인간 사회화가 되지 못했잖ㅇ....
아무튼 미국이나 한국이나... 안타까운 상황이다 싶었다. 비상계엄 이후로 현재까지 800조에 가까운 국가적 손해를 봤다고 하는데, 환율도 많이 오르고... 여러모로 이게 맞게 돌아가는 나라 꼴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비상계엄 이후로 거의 세 달이 되어가는데 딱히 더 나아지는 것같아 보이지 않는다. 민주당은 분열하고, 국민의 힘과 대한민국 개신교는 내란수괴의 편에 서서 싸운다. 정치 성향을 떠나서, 사람들이 자신의 의견 없이 남의 말에 휘둘리며 바보가 되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손가락 인형이 된 멍청한 사람들을 보는 기분이 참담하다. 이 책을 한 번만이라도 읽어봐달라고 하고 싶었다. 나와 같은 결론을 내리지 않아도 되니까, 당신이 직접 정보를 받아들이고 직접 생각하라고 말하고 싶은 생각이 항상 든다.
좋은 책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것 같다. 이 책은 정말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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