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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독서

<바늘 끝에 사람이> 전혜진

2023.12.10. ~ 2023.12.11. (2)

바늘 끝에 사람이

전혜진 저
한겨레출판 출판
2023년 05월 18일 출간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무례하고 폭력적인 세상을 향한 잘 벼른 칼날”이자 한국 장르 문학의 베테랑인 전혜진 작가의 두 번째 소설집. 중편소설 〈감겨진 눈 아래에〉와 장편소설 《280일》을 통해 ‘한국의 마거릿 애트우드’라는 평을 받은 그는 특히 디스토피아, 사이버펑크, 아포칼립스 세계관을 즐겨 찾는 독자들에겐 ‘믿보작(믿고 보는 작가)’이라고 불린다. 머나먼 미래를 배경으로 귀신이 출몰하는 상황조차도 전혜진의 손끝을 거치면 지금 이곳에서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하이퍼리얼리즘 판타지’가 되기 때문이다.

《바늘 끝에 사람이》는 “전혜진 작가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바로 그 방식으로, 격랑의 역사 속 움튼 폭력과 비극의 모티프를 박진감 있게 재구성한다.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사건을 우주 궤도 엘리베이터 건설과 사이보그 노동자의 이야기로 담아낸 〈바늘 끝에 사람이〉, 전교조 탄압 사건을 환상적인 미스터리로 풀어낸 〈안나푸르나〉, 제주4·3을 전설적 존재와 동양풍 호러로 다룬 〈할망의 귀환〉과 〈단지〉, 한국전쟁의 참상과 설화를 절묘하게 엮은 〈내가 만난 신의 모습은〉, 공군 내 성범죄를 강렬한 복수 스릴러로 담은 〈창백한 눈송이들〉, 5·18민주화운동이 남긴 아픔과 연대를 보여준 〈너의 손을 잡고서〉가 그렇다.


우주 작업 중 사고가 났을 때를 위해 체내에 보관하고 있는 비상용 산소 캡슐이 있긴 하지만 그런 것도 구하러 와 줄 사람이 있을 때나 의미가 있다. 나는 사측의 주식이 너 무 갑자기 떨어지지 않기를, 그래서 주가를 방어하겠다며 나를 죽여서라도 치우겠다고 결심하지 않기를 바라며 그 나마 최소한의 환경이 유지된 시스템실에서 하루종일 버 티고 있었다.

굳이 말하자면 그 모든 일은 이곳에서 농성하기 위해서 가 아니라 그저 살아남기 위한 일이었다. 나는 평원고무공 장 사장의 일방적인 임금 삭감에 의해 을밀대 지붕 위에 올라가 "노동대중을 대표해 죽음을 명예로 알겠다"라고 외치던 을밀대상 강주룡이 아니 었다. 가발 수출 업체였던 YH무역이 방만한 경영 끝에 여 공들을 쫓아내자 항의 시위를 하다가 경찰에게 맞아 죽은 스물두 살의 김경숙이 아니었다. 1981년 대한조선공사에 입사한 여성 최초의 용접공으로 부당해고에 반발하여 크레 인 위에서 고공농성을 벌였던 한진중공업의 김진숙이 아니 었다. 무언가의 상징이 되는 일에는 흥미가 없었다.

나이가 든다는 건 어렸을 때 몰랐고 또 이 해할 수 없었던 일들을 하나하나 찾아가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이것만 쓰러뜨리면 돼.
"무슨 소리야…."
"네 귀에는 안 들리겠지. 저 시켜면 땅 아래로 피가지득 차올라서 섬이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그건 그렇지. 그래도 꽤 재밌었어. 언니가 한턱낸 배달 주문 쿠폰으로 치킨 시켜 먹고, 축의금 계좌로 이체하고. 언 니는 무슨 유튜버같이 아무개가 축의금 얼마를 쏴 주셨습니다, 하면서 감사 인사하고. 결혼식인지 유튜브 라이브 방 송인지 모르겠더라니까."

"네 언니들도 다들 그런 얼굴을 하며 따라왔다. 서러워 서 그런 게지. 농사짓고 물질하여 온 식구 입에 풀칠이라도 하게 만드는 건 죄다 그 집 딸들이고 아낙들인데. 이렇게 먹고살기 어려워지면 밥이나 축내는 군식구 취급을 하다 가, 집을 떠난다기에 기뻐들 하는데. 서럽지. 왜 아니 서럽 겠느냐."

중년 남자들은 대체 왜 그럴 까. 그들은 자기보다 어린 사람, 특히 젊은 여자에게 이유도 없이 화를 내면서 자신에게는 남에게 못되게 굴어도 되는 권리가 처음부터 주어진 것처럼 굴곤 했다. 그렇게 뻔뻔해 지려면 사람이 어디서부터 잘못되어야 하는 걸까.

"그 소위는 아직도 장례를 못 치뤘어." 반장은 그 말을 하고 유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유 진은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2년 전에 죽은 사람 인데 아직도 장례를 못 치르다니?
"지금도 병원 영안실에 있지. 2년 반 동안 거기 있었으니 영안실 비용도 어마어마한데 그런데도 그 부모는 그걸 다 감당하더라도 기다리겠다는 거야."
기다리다니 대체 무엇을? 가해자들의 처벌을? 그건 다 끝난 일이 아니었나? 가해자 중 일반 병조차도 선처받은 마 당에 대체 무엇을?
"순직 처리를."

"차라리 내가 옛날이야기에 나오는 선비나 사또, 뭐 그 런 사람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독서모임 책으로 추천되어 읽게 된 책인데, 대한출판문화협회가 2023년 하반기 올해의 청소년 교양도서로 선정한 책 중 한 권이기도 하다. 이 책은 실제로 발생했던 사건을 작가의 강렬한 문체로 독자들에게 소리치는 책이었다.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사건, 전교조 탄압 사건, 제주 4.3, 한국 전쟁, 공군 내 성범죄, 5.18 민주화운동 등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누군가는 이 책을 추천하고 동조하는 사람들에게 빨갱이라고 할지도 모르고, 개 패듯 패야 한다고 할지도 모른다(ㅋㅋ). 하지만 이 일들은 실제로 벌어진 일이며, 지금도 여전히 피해자가 발생하고 있는 일이기도 하다. 누군가에겐 현실이고, 이 책을 읽는 이에게는 현실이거나 소설일 뿐이거나, 반국가세력적인 괴담일지도 모르겠다. 정보라 작가는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전혜진 작가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방식이다."라고 말하였는데, 나도 이에 동의한다. 이렇게 강력한 방식으로 현실을 독자들의 가슴 속 깊게 뿌리내릴 수 있는 작가가 얼마나 있겠는가?

역사책을 읽어서는 전면적인 진실 혹은 가려진 거짓만을 볼 것이고, 기사에서는 편향된 이야기를 들을 뿐이고, 피해자 호소문으로는 가슴이 먹먹해질 뿐일 것이다. 그저 고개를 끄덕이고 마음을 아파하는 일 말고, 이 일이 우리 마음 속 깊은 곳까지 남아 흔적을 남기고 영원히 기억하며, 다시는 그런 피해자가 없기를 바라며 주먹을 쥐고 하늘을 향해 흔드는 일을 하게 되는 것은, 이렇게 피해자의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보게 하는 글을 읽는 것이 아마 유일하지 않을까? 문학이 가지는 힘이 바로 이런 것일게 분명하다.

 

개인적으로는 여러 단편 중에서 '안나푸르나', '할망의 귀환', '내가 만난 신의 모습은', '너의 손을 잡고서'가 가장 좋았다.

사람마다 좋아하는 단편이 다른 것을 보니 신기하기도 했다. 위의 네개의 글이 좋다고 해서 다른 글들이 별로인 것은 아니었다. 첫번째 소설인 '바늘 끝에 사람이'를 제외하고는 모두 동양판타지 느낌이 강했는데, 그러다보니 민간신앙적인 요소들이 많이 나오고 무당이나 귀신과 같은 한국식, 동양식 판타지 느낌이 많았다. 나는 이런 묘사들을 좋아해서 재미있게 읽었다. 뭐 동양의 인어, 산속에 사는 늑대인간과 같은 이야기 보다는, 사람들이 매일 밤을 울며 지내니 귀인을 데려온 할머니가 사실은 산신이었다거나, 이 마을을 지키는 수호나무가 자기의 온 힘을 쏟아내 마지막으로 마을 사람들을 지켰다거나 하는 류의 이야기를 좋아한다. 가장 한국적인 이야기인 것 같다.

안나푸르나의 경우는 그냥 일상물이고 현대물의 느낌이 들었다. 전혀 판타지의 느낌이 없었는데, 그것대로 좋았다. 나도 전교조 선생님을 담임으로 둔 적이 있었다. 고3때였다. 아이들 중 누구도 그 선생님을 싫어하지 않았다. 그저 저 선생님은 독특해~ 하고 생각했다. 그 선생님은 아직도 많은 아이들에게 사랑을 받고 인기있는 선생님이라고 알고 있다. 사람들이 전교조를 싫어하는 이유가 뭘까 종종 생각한다. 왜냐하면 나에겐 정말 좋은 선생님이었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