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1.17. ~ 2024.01.17. (1)
인간실격
人間失格
다자이 오사무 저
김춘미 역
민음사 출판
2004년 05월 15일 출간
소설/시/희곡 > 일본소설 > 1950년대 이전 일본소설
자살 미수와 약물 중독, 39세의 젊은 나이에 자살로 생을 마감한 다자이 오사무의 작품 <인간 실격>이 출간됐다. 오직 순수함만을 갈망하는 한 젊은이가 파멸해가는 과정이 그려진다. 뉴욕 타임스는 '인간의 나약함을 드러내는 데 있어 다자이보다 뛰어난 작가는 드물다'고 평했다.
작품은 '나'라는 화자가 서술하는 서문과 후기, 작품의 주인공인 요조가 쓴 세 개의 후기로 구성되어 있다. 태어날 때부터 '다른 인간들'을 이해할 수 없었던 요조는 세상에 동화되기 위해 '익살꾼'을 자처하지만 번번히 좌절하고 결국 마약에 중독, 자살을 기도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거듭된 동반 자살 시도에서 혼자만 살아남은 요조는 본가로부터 절연 당하고 외딴 시골집에서 쓸쓸히 죽음을 기다리는 '인간 실격자'가 되고 만다.
함께 실린 '직소'는 유다가 예수를 고발하는 자리에서 늘어놓는 이야기이다. 일반적인 해석과 달리, 예수를 흠모하고 사랑했지만 그 사랑을 거부당한 데 대한 분노와 반발심으로 예수를 팔아넘긴 유다의 갈등과 번민을 생생하게 묘사한다.
부끄럼 많은 생애를 보냈습니다.
저는 인간의 삶이라는 것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저에게는 ‘인간이 목숨을 부지한다.’라는 말의 의미가 지금껏 전혀 이해되지 않았다는 얘기가 될 것 같습니다. 제가 가진 행복이라는 개념과 이 세상 사람들의 행복이라는 개념이 전혀 다를지도 모른다는 불안. 저는 그 불안 때문에 밤이면 밤마다 전전하고 신음하고, 거의 발광할 뻔한 적도 있었습니다. 저는 과연 행복한 걸까요? 저는 어릴 때부터 정말이지 자주 참 행운아다, 라는 말을 들어왔습니다. 하지만 저 자신은 언제나 지옥 가운데서 사는 느낌이었고, 오히려 저더러 행복하다고 하는 사람들 쪽이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훨씬 더 안락해 보였습니다.
나한테는 재난 덩어리가 열 개 있는데, 그중 한 개라도 이웃 사람이 짊어지게 되면 그것만으로도 그 사람에게는 충분히 치명타가 되지 않을까, 라고 생각한 일도 있습니다.
즉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웃 사람들의 괴로움의 성질과 정도라는 것이 전혀 짐작이 가지 않았던 것입니다. 실용적인 괴로움, 그저 밥만 먹을 수 있으면 그것으로 해결되는 괴로움. 그러나 그 괴로움이야말로 제일 지독한 고통이며, 제가 지니고 있는 열 개의 재난 따위는 상대도 안 될 만큼 처참한 아비지옥일지도 모릅니다. 그건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치고는 자살도 하지 않고 미치지도 않고 정치를 논하며 절망도 하지 않고 좌절하지도 않고 살기 위한 투쟁을 잘도 계속하고 있다. 괴롭지 않은 게 아닐까? 철저한 이기주의자가 되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고 확신하고 한번도 자기 자신에게 회의를 느낀 적이 없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편하겠지. 하긴 인간이란 전부 다 그런 거고 또 그러면 만점인 게 아닐까. 모르겠다…… 밤에는 푹 자고 아침에는 상쾌할까? 어떤 꿈을 꿀까? 길을 걸으면서 무얼 생각할까? 돈? 설마 그것만은 아니겠지. 인간은 먹기 위해 산다는 말은 들은 적이 있지만 돈 때문에 산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어. 아닐 거야. 그러나 어쩌면…… 아니, 그것도 알 수 없지…….
저는 가족한테 꾸중을 듣고 말대꾸한 적이 한번도 없습니다. 그 사소한 꾸중은 저에게는 청천벽력과도 같아 저를 미칠 지경에 이르게 했기 때문에 말대꾸는커녕 그 꾸중이야말로 말하자면 만세일계(万世一系), 즉 고대로부터 단일 계통을 이어온 일본인의 ‘진리’임에 틀림없다, 나한테는 그 진리를 행할 능력이 없으니까 더 이상 인간과 더불어 살 수 없는 게 아닐까, 라고 확신해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말싸움도 자기변명도 하지 못했습니다. 남이 저에게 욕을 하면 그래 정말이야, 내가 엄청 잘못 생각하고 있었어, 그렇게 생각되어서 언제나 그 공격을 잠자코 받아들이고 속으로는 미칠 듯한 공포를 느꼈던 것입니다.
여자는 남자보다 익살에 경계심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제가 익살을 연기해도 남자들은 뭐니 뭐니 해도 언제까지나 깔깔거리지는 않았고, 저도 남자들한테는 너무 신명 나서 익살을 떨면 실패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적당한 선에서 그만두도록 조심했습니다. 그러나 여자라는 것은 적당하다는 것이 뭔지 모르는 생물 같아서 언제까지나 저한테 익살 떨기를 요구했고, 저는 그 끝없는 앙코르에 응하느라 기진맥진해져 버리곤 했습니다. 정말이지 잘도 웃어들 댔습니다. 도대체가 여자들은 남자보다 쾌락에는 훨씬 더 탐욕스러운 듯합니다.
저는 뭔가를 사고 나서 돈을 건넬 때면, 인색해서가 아니라 너무 긴장하고 너무 부끄럽고 너무 불안하고 너무 두려워서 어찔어찔 현기증이 나고 눈앞이 캄캄해지고 거의 반쯤 미친 것처럼 되어, 값을 깎기는커녕 거스름돈 받는 것을 잊어버릴뿐더러 산 물건을 갖고 오는 것을 잊은 적도 종종 있을 정도였기 때문에 도저히 혼자서는 도쿄 거리를 다닐 수가 없었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온종일 집 안에서 뒹굴거리며 보내던 그런 속사정도 있었던 것입니다.
저한테 창녀라는 것은 인간도 여성도 아닌 백치 혹은 미치광이처럼 느껴져서 그 품 안에서는 완전히 안심하고 푹 잘 수 있었습니다.
그날 오전 우리 두 사람은 아사쿠사를 헤매고 다니다가 다방에 들어가서 우유를 마셨습니다.
“당신이 내줘요.”
일어서서 소매에서 지갑을 꺼내어 여니 동전 세 닢뿐. 수치심보다도 참담한 느낌이 엄습했고 금방 뇌리에 떠오르는 것은 센유관의 내 방. 교복과 이불만이 남아 있을 뿐, 이제는 더 이상 전당포에 맡길 만한 것 하나 없는 황량한 방. 그 밖에는 내가 지금 입고 있는 이 잔무늬 옷과 망토뿐. 이것이 내 현실인 것이다. 더 이상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확실하게 깨달았습니다.
제가 우물거리고 있으니까 여자가 일어나더니 제 지갑을 들여다봤습니다.
“어머나, 겨우 그것뿐이야?”
무심한 목소리었습니다만 그것 또한 뼈에 사무치게 아팠습니다. 처음으로 제가 사랑한 사람의 말이었던 만큼 쓰라렸습니다. 동전 세 닢은 돈도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그때까지 제가 맛보지 못했던 기묘한 굴욕이었습니다. 도저히 더 이상 살아갈 수 없는 굴욕이었습니다. 필경 당시의 저는 아직 부잣집 도련님이라는 자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겠죠. 그때 저는 자진해서라도 죽으려고 진심으로 결심했습니다.
그러나 그 시절의 추억 가운데에도 단 한 가지 진땀 나는, 평생 잊을 수 없는 비참한 실수가 있었습니다. 저는 검찰청의 어두컴컴한 방에서 검사로부터 간단한 취조를 받았습니다. 검사는 사십 세 전후의 조용한(만일 제가 미남이었다 해도 그것은 소위 사악한 미모였음에 틀림없습니다만, 그 검사의 얼굴은 ‘올바른 미모’라고 부르고 싶을 만큼 총명하고 고요한 기운을 띠고 있었습니다.) 사람이었고 곰살맞은 인품이 아닌 것 같아서 저도 전혀 경계하지 않고 멍하니 진술하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예의 기침이 나기에 저는 소매에서 손수건을 꺼내었는데 문득 거기 묻은 피를 보고 이 기침 또한 무슨 소용에 닿을지도 모른다는 천박한 술책으로 쿨럭쿨럭 하고 두어 번, 거기다 가짜 기침까지 요란하게 보태어 기침을 한 후에 손수건으로 입을 가린 채 검사 얼굴을 흘깃 본 순간.
“진짜야?”
조용한 미소였습니다. 진땀이 석 되 흘렀습니다. 아니, 지금 생각해도 콱 죽고 싶어집니다. 중학교 시절, 저 바보 다케이치한테서 부러 그랬지, 라는 말로 등에 칼을 맞아 지옥으로 굴러 떨어졌던 때의 느낌 이상이라고 해도 결코 과장이 아닌 기분이었습니다. 그 일과 이 일, 이 두 가지는 제 생애의 연기 중 대실패의 기록입니다. 검사의 그런 조용한 모멸에 맞닥뜨리느니 차라리 십 년 형을 구형받는 편이 나았다고 생각할 때조차 가끔 있을 정도입니다.
아아, 저에게 냉철한 의지를 주소서. ‘인간’의 본질을 알게 해주소서. 사람이 사람을 밀쳐내도 죄가 되지 않는 건가요. 저에게 화낼 수 있는 능력을 주소서.
“그나저나 네 난봉도 이쯤에서 끝내야지. 더 이상은 세상이 용납하지 않을 테니까.”
세상이란 게 도대체 뭘까요. 인간의 복수(複數)일까요. 그 세상이란 것의 실체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무조건 강하고 준엄하고 무서운 것이라고만 생각하면서 여태껏 살아왔습니다만, 호리키가 그렇게 말하자 불현듯 “세상이라는 게 사실은 자네 아니야?”라는 말이 혀끝까지 나왔지만 호리키를 화나게 하는 게 싫어서 도로 삼켰습니다.
‘그건 세상이 용납하지 않아.’
‘세상이 아니야. 네가 용서하지 않는 거겠지.’
‘그런 짓을 하면 세상이 그냥 두지 않아.’
‘세상이 아니야. 자네겠지.’
‘이제 곧 세상에서 매장당할 거야.’
‘세상이 아니라 자네가 나를 매장하는 거겠지.’
‘너는 너 자신의 끔찍함, 기괴함, 악랄함, 능청맞음, 요괴성을 알아라!’
갖가지 말이 가슴속에서 교차했습니다만, 저는 다만 얼굴에 흐르는 땀을 손수건으로 닦으면서 “진땀 나네, 진땀.” 하고 웃을 뿐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때 이후로 저는 ‘세상이란 개인이 아닐까.’ 하는 생각 비슷한 것을 가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두꺼비.
그게 나야. 세상이 용납할 것도 용납하지 않을 것도 없지. 매장이고 뭐고 할 것도 없어. 나는 개보다도 고양이보다도 열등한 동물인 거야. 두꺼비. 느릿느릿 꾸물거리기만 하는 두꺼비.
“아빠는 말이야, 술이 좋아서 마시는 게 아니에요. 너무 착한 사람이라, 그래서…….”
인간 실격.
이제 저는 더 이상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지금 저에게는 행복도 불행도 없습니다.
모든 것은 지나간다는 것.
제가 지금까지 아비규환으로 살아온 소위 ‘인간’의 세계에서 단 한 가지 진리처럼 느껴지는 것은 그것뿐입니다.
모든 것은 그저 지나갈 뿐입니다.
저는 올해로 스물일곱이 되었습니다. 백발이 눈에 띄게 늘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흔 살 이상으로 봅니다.
엄청 유명한 작품이기도 하고... 나만 안 본 것 같아서 읽어봤다. 독서모임에서 2024 세계문학빙고 하는김에 읽는 것도... 겸사겸사.
전체적인 총평을 말하자면 예술병 걸린 남자 대학생의 '무너진 나의 인생' 이라는 제목의 수필을 보는 기분이었다. 숨쉬듯 자연스럽게 뿜어져 나오는 여혐과 자존감이 낮지만 동시에 스스로를 너무 사랑하는 탓에 풍기는 역겨움 등이 느껴져 읽는 내내 좀 짜증났다ㅋㅋㅋ 책을 읽기 시작한 초반에는 내가 SNS에 "이렇게까지 자존감이 낮고 자기 파괴적인 인간의 자낮일기장을 내가 훔쳐봐야 하는 이유가 뭐지?" 였다. 읽는 내내 레전드 하남자, 개그맨유형 까불이, 예술충남성 이런 소리를 했다. 내가 책을 많이 안읽기도 하고, 현대소설의 경우 여성작가의 글을 더 많이 읽긴 했지만, 남성 작가들의 현대소설도 읽다보면 이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옛날 소설이니 어쩔 수 없나보다 이런 생각을 하며...읽는 내내 불편했던 점은 첫째로 이 부분에서 저한테 창녀라는 것은 인간도 여성도 아닌 백치 혹은 미치광이처럼 느껴져서 그 품 안에서는 완전히 안심하고 푹 잘 수 있었습니다. 라고 하는데, 이것이 창녀와 자신이 동류이고, 창녀와 어울리는 동안 자신에게 역겨운 기운이 풍기게됐다고 하는게 웃겼다. 그동안 파괴적이며 비사회적으로 살아온 것은 문제가 전혀 없지만 “창녀”라는 인간도 무엇도 아닌 어떤 살덩어리들을 껴대고 편히 지냇더니 “창녀”의 역겨운 기운이 옮았다 이런 소리인가 싶어서 불쾌함이 느껴졌다. 어쨌거나 주인공은 본인이 직접 선택하여 마음의 위안을 둘 곳을 '창녀'로 선택하였고, 그것을 본인도 즐거이 여겼음에도 자신은 그들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라고 선을 그으며 자신의 고귀함을 언급하는 것이 불쾌했다. 이게 고도의 미러링인가 이런 생각이 들 정도로 황당하다고 느껴졌다. 어떤 혐오와 접촉했을 때, 그것에 손을 뻗어 평안을 얻고 즐긴 자신은 청렴결백하고, 심지어 자신은 그저 사회에 존재하는 시스템을 이용해 심리적 위안을 삼았을 뿐 죄는 없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이 불쾌했다. 너무나도 전형적인...... 쨌든.이 책에 대해서 더 길게 이야기할만한 내용은 없는 것 같다. 왜 이렇게 유명한지 사실 잘 모르겠고... 불안과 우울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글들은 많다. 최근에 읽은 <보트하우스>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욘 포세의 글에서 종종 젖가슴이니 미혼모니 하는 언급이 나오지만 그렇게까지 불쾌한 언급은 아니다. 물론 두 작가의 시대가 다르고, 둘을 함께 언급하기에는 너무나 크게 다른 벽이 있다. 하지만 내가 여기서 굳이 욘 포세를 꺼낸 이유는, 내가 최근들어 가장 좋아하는 남성 작가이기도 하고, 욘 포세가 불안을 언급하는 방식을 너무 마음에들어하며 읽었었기 때문이다. 그의 불안은 노래하듯 정말 불안을 터트리는 느낌이 들었다면, 다자이 오사무의 불안은 그저 우울에 잡아먹혀 자신을 사랑함에도 자신이 처한 환경이 싫어 발악하는 것으로 느껴질 뿐이었다.소설을 잘 모르겠어서... ㅋㅋㅋ 해설을 꼼꼼하게 읽어볼까 하다가 크게 내가 의미를 찾아 무얼할까 싶어서 책을 덮었다. 대부분의 여성 지인들은 이 글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았는데, 읽고보니 이유를 알겠더라~ 하는 이야기. 그래도 유명한 글이니 읽어서 나쁠 것 없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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