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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독서

<맡겨진 소녀> 클레어 키건

2023.12.04. ~ 2023.12.04. (1)

맡겨진 소녀
Foster

클레어 키건 저
허진 역
다산책방 출판
2023년 04월 26일 출간

소설/시/희곡 > 세계의 소설 > 아일랜드소설


자국 아일랜드에서는 오래전부터 거장의 반열에 올랐으나 2021년부터 미국 독자 대중 사이에 서서히 화제가 되더니, 이제는 독자들이 잃어버린 시간을 벌충하려는 듯 애타게 찾는 소설가가 있다. “한 세대에 한 명씩만 나오는 작가”로 불리는 아일랜드 현대문학의 대표 작가 클레어 키건의 이야기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2004년에 외국 작가들의 단편을 엮은 『생일 이야기(Birthday Stories)』의 개정판에 그의 작품을 실으며 “키건은 간결한 단어로 간결한 문장을 쓰고, 이를 조합해 간결한 장면을 만들어나간다”라는 평과 함께 그를 향한 찬사를 보내기도 했다.

《가디언》은 키건의 작품을 두고 “탄광 속의 다이아몬드처럼 희귀하고 진귀하다”고 평한 바 있는데, 이는 24년의 활동 기간 동안 그가 단 4권의 책만을 펴냈기 때문이다. 키건은 이 몇 안 되는 작품으로 오웰상, 루니 아일랜드 문학상, 윌리엄 트레버상, 에지 힐상 등 수많은 상을 받았고, 최근작 『이처럼 사소한 것들(Small Things Like These)』로 2022년 부커상 최종후보에 오르며 그의 이름을 평단과 독자들에게 강렬하게 각인시켰다.

『맡겨진 소녀』는 국내에 처음으로 선보이는 클레어 키건의 작품이다. 2009년 데이비 번스 문학상을 수상한 이 책은 2010년 2월 《뉴요커》에 축약본으로 먼저 발표되었다가, 같은 해 10월에 중편소설로서는 이례적으로 단독 출판되었다. 아일랜드에서는 출간 이래로 교과과정에 줄곧 포함되어 자국의 국민 모두가 읽는 소설로 자리 잡았다.

이 작품은 2022년 콤 베어리드 감독에 의해 영화 「말없는 소녀」로 제작되어 아일랜드 영화로서는 최초로 제95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 국제장편영화상 최종후보에 올랐으며 제72회 베를린국제영화제 2관왕 등을 수상했고, 올해 5월 31일 국내 개봉을 앞두고 있다.


두 사람은 가만히 서서 잠시 마당을 바라보더니 비 이야기를 한다. 비가 너무 적게 왔다, 밭에 비가 좀 내려야 한다, 킬머크리지 신부님이 오늘 아침에 비를 내려달라고 기도를 드렸다, 이런 열음은 처음이다. 잠시 대화가 끊긴 사이에 아빠가 침을 뱉고, 대화는 다시 소의 가격, 유럽경제공동체, 남아도는 버터, 소독액과 석회 가격으로 흘러간다. 나에게도 익숙한 모습이다. 남자들은 이런 식으로 사실은 아무 이야기도 나누지 않는다.

아주머니가 웃으며 자기 엄지를 핥더니 내 얼굴에 묻은 무언가를 닦아준다. 엄마의 엄지보다 부드러운 손가락이 뭔지 모를 것을 말끔하게 닦아내는 느낌이 든다. 아주머니가 내 옷을 보자 나도 아주머니의 눈을 통해서 내 얇은 면 원피스와 먼지투성이 샌들을 본다. 우리 둘 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순간이 흐른다. 묘하게 무르익은 산들바람이 마당을 가로지른다.

"먹을 건 엄청나게 축낼 겁니다." 아빠가 말한다. "하지만 열두 달 지나면 다 잊어버리겠죠."

"비밀이 있는 곳에는 부끄러운 일이 있는 거야." 아주머니가 말한다. "우린 부끄러운 일 같은 거 없어도 돼."

머그잔을 물에 담갔다가 입으로 가져온다. 물은 정말 시원하고 깨끗하다. 아빠가 떠난 맛, 아빠가 온 적도 없는 맛, 아빠가 가고 아무것도 남지 않은 맛이다. 나는 머그잔을 다시 물에 넣었다가 해빛과 일직선이 되도록 들어 올린다. 나는 물을 여섯 잔이나 마시면서 부끄러운 일도 비밀도 없는 이곳이 당분간 내 집이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애 키가 꽤 크네요." 점원이 말한다.
"우리 집안은 다 커요." 아주머니가 말한다.
"엄마를 속 빼닮았군요. 이제 보니 알겠어요." 점원이 연보라색이 제일 잘 맞고 ㅇ잘 어울린다고 하자 킨셀라 아주머니도 맞장구를 친다. 아주머니는 내가 이 집에 처음 온 날 아주머니가 입었던 것과 무척 비슷한 반팔 날염 블라우스와 짙은 파란색 바지, 앞쪽에 버클과 끈이 달린 에나멜가죽 구두, 팬티, 발목까지 올라오는 흰색 양말도 사준다. 점원이 명세서를 건네자 킨셀라 아주머니가 지갑을 꺼내서 돈을 낸다.
"예쁘게 입으렴." 점원이 말한다. "엄마가 정말 잘해주시는구나?"
거리로 나오자 가열한 햇빛이 다시 느껴진다. 눈이 멀 것 같다. 나는 마음 한구석으로 햇빛이 사라지면 좋겠다고, 구름이 껴서 제대로 좀 보이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킨셀라 아저씨가 내 신발을 벗기고 재킷을 입혀준다. 그 남자애의 옷이라는 걸 이제 나도 안다.

아저씨가 우리 발자국을 따라가려고 해변에 불빛을 비추지만 내 발자국밖에 보이지 않는다.
"저기서는 네가 날 업고 왔나 보다." 아저씨가 말한다.
나는 내가 아저씨를 업는다는 것이 너무 말도 안 돼서 웃지만 곧 그것이 농담이었음을, 그 농담을 내가 알아들었음을 깨닫는다.

"보렴, 저기 불빛이 두 개밖에 없었는데 이제 세 개가 됐구나."
내가 저 멀리 바다를 본다. 아까처럼 불빛 두 개가 깜빡이고 있지만 또 하나가, 두 불빛 사이에서 또 다른 불빛이 꾸준히 빛을 내며 깜빡인다.
"보이니?" 아저씨가 말한다.
"네." 내가 말한다. "저기 보여요."
바로 그때 아저씨가 두 팔로 나를 감싸더니 내가 아저씨 딸이라도 되는 것처럼 꼭 끌어안는다.

나는 그 자리에 선 채 불을 빤히 보면서 울지 않으려고 애쓴다. 울지 않으려고 애쓰는 건 정말 오랜만이고, 그래서 울음을 참는 게 세상에서 제일 힘든 일이라는 사실이 이제야 떠오른다. 킨셀라 아저씨가 밖으로 나가는 것 같다. 소리가 들린다기보다 느껴진다.

자갈 진입로에서 자동차 브레이크를 밟는 소리와 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어느새 나는 내가 제일 잘하는 일을 하고 있다. 생각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나는 선 자세에서 곧장 출발하여 진입로를 달려 내려간다. 심장이 가슴 속이 아니라 내 손에 쥐어져 있는 것 같다. 나는 내 마음을 전하는 전령이 된 것처럼 그것을 들고 신속하게 달리고 있다. 여러가지 일들이 마음속을 스친다. 벽지에 그려진 남자아이, 구스베리, 양동이가 나를 아래로 잡아당기던 그 순간, 길 잃은 어린 암소, 젖은 매트리스, 세 번째 빛. 나의 여름을, 지금을, 그리고 대체로 이 순간만을 생각한다.

모퉁이를 돌아 차마 똑바로 쳐다볼 용기가 나지 않는 곳에 도착하니 아저씨가 대문 죔쇠를 돌려놓고 다시 즘그고 있다. 아저씨의 시선은 아래를 향하고 있다. 자기 손을,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보고 있는 것 같다. 내 발이 진입로 중앙에 풀이 지저분하게 자란 부분을 따라 달리며 울퉁불퉁한 자갈을 세차게 밟는다. 지금 나에게 중요한 것은 딱 하나밖에 없고, 내 발이 나를 그곳으로 데려간다. 아저씨는 나를 보자마자 딱 멈추더니 꼼짝도 하지 않는다. 나는 망설임 없이 아저씨를 향해 계속 다렬가고, 그 앞에 도착하자 대문이 활짝 열리고 아저씨 품에 부딪친다. 아저씨가 팔로 나를 안아 든다. 아저씨는 한참 동안 나를 꼭 끌어 안는다. 쿵쾅거리는 내 심장이 느껴지고 숨이 헐떡거리더니 심장과 호흡이 제각각 다르게 차분해진다. 어느 순간, 시간이 한참 지난 것만 같은데, 나무 사이로 느닷없는 돌풍이 불어 우리에게 크고 뚱뚱한 빗방울을 떨어뜨린다. 눈을 감으니 아저씨가 느껴진다. 차려입은 옷을 통해 전달되는 아저씨의 열기가 느껴진다.

"아빠." 내가 그에게 경고한다. 그를 부른다. "아빠."


<맡겨진 소녀>는 영화 <말없는 소녀>로 알게 되었다. 해당 영화는 보지 않았는데, 그 분위기가 어떤지 알고 있었다. 밀리의 서재를 구독하는 중에 12월 말에 <맡겨진 소녀>가 내려가게 된다는 이야기를 보고 빠르게 읽었다. 실제 종이책은 104p 정도의 매우 얇은 책이고, 나는 전자책으로 65p로 읽었다.

내용은 매우 간결하고 짧은데 문장 하나하나마다, 상황 하나하나마다 담고있는 것이 너무 거대하고 커서 마음이 벅차올랐다. 소녀는 아주 짧게, 그저 처음 보는 친척에게 맡겨졌을 뿐이었다. 다정함의 힘은 이렇게나 강력하다. "네"라고도 잘 발음하지 못하던 아이는 이제는 "네."라고도 발음하고, 그만 눈이 부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아이는, 저 멀리 반짝이는 두개의 빛 사이에 떠오른 다른 하나의 빛이 무엇인지도 알 수 있게 된다.

이야기가 담는 따스함이 글을 읽는 내내 온 몸으로 퍼져나갔다. 사랑받는 다는 것은 이렇게나 중요하다.

우울하면서도 조용히 번지는 듯 흐르는 이야기는 장면마다 어떠한 의미가 부여되어있는 듯 했다. 읽으면서 맞나? 내가 또 과한 해석을 하고 있는걸까 하고 읽었는데, 마지막에 작가소개를 읽으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예를들어 아주머니가 웃으며 자기 엄지를 핥더니 내 얼굴에 묻은 무언가를 닦아준다 는 장면은, 이 아이가 이곳에서 사랑받을 것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작가의 의도는 내가 생각한 것과 정확히 일치하지 않을 수 있다. 나는 이 장면이, 외로움이나 서먹함을 닦아내고 애정으로 아이를 어루만져주었다고 느꼈다. 얼굴에 묻은 어색함과 서먹함을 닦아내준   아주머니가 내 옷을 보자 나도 아주머니의 눈을 통해서 내 얇은 면 원피스와 먼지투성이 샌들을 본다. 우리 둘 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순간이 흐른다. 묘하게 무르익은 산들바람이 마당을 가로지른다라고 한다. 둘 사이에 서먹함을 닦아내어도 어쩔 수 없다. 하지만 묘하게 무르익은 산들바람은 마당을 가로지르며 그 둘 사이가 공허만은 아니라고 말해주는 듯 했다. 전체적인 이야기가 이런 방식으로 서술되고, 이것은 클레어 키건 특유의 문체이며 글쓰기 스타일이라고 한다. 앞으로 이 작가의 책이 더 많이 국내에 번역되어 들어오면 좋겠다고 느꼈다.

가장 좋았던 장면은 아저씨와 소녀가 바다를 걷는 장면이었다. 반짝이는 저 바다 너머 두개의 불빛이 세개가 된다는 그 장면이 가장 좋았다. 서로의 빈 공간을 채워주는 이들이 뭐가 나쁜가 싶다. 사랑으로 서로를 채워주고 그것이 곪아 썩어들어가지 않게 서로를 사랑해주고 다정을 나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일까 하는 생각을 했다.

학교가 끝나고 겨울이 되어서, 그리고 다시 여름이 되고, 또 겨울이 되기를 반복하며... 소녀가 자신이 사랑받았다는 것을 잊지 않고 살아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너무 좋은 책이어서, 한 권 구매해야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의 좋은 책이었다. 나중에 원서로 구매를 해볼까 생각 중.